우리 집에 도둑이라는 손님이 든 게 40여 년 전, 내가 막 서른 살을 넘었을 때였다. 당시 L 전자의 초임 관리자로서 충청, 전라 지역 여섯 개 서비스 센터를 책임지며 대전에 본부를 두고, 충주, 청주, 전주, 광주 그리고 순천에 있는 서비스 센터와 곳곳의 대리점을 틈나는 대로, 아니, 일부러 시간을 내서 방문하며 바쁘게 지내던 시절이었다. 일 년에 출장 일수가 백일이 넘었으니, 갓난아기인 큰딸이 자라는 것도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일 년 내내 휴일도 없이 동서남북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큰딸과 두 살 터울로 작은딸을 만들었으니, 3년 동안 두 딸을 낳기만, 아니 만들기만 했지, 보살필 줄을 모른 무심한 아비였다는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회사에서 제공한 사택은 대지와 건물이 넓어서 휑뎅그렁했다. 언덕을 따라 높낮이를 맞춰서 지은 집이라 주방과 응접실은 제일 낮은 곳에, 계단 몇 개 위에는 침실이 있었고, 그 위에 또 옥탑방이 있었으니 사실상 3층 집이었다. 옆집과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밤에 우리 식구만 지내기에는 너무 한적했다. 게다가 나는 일 년에 100일 넘게 출장을 다녔으니 갓난 큰딸과 아내만 집을 지킬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출장을 다니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비교적 안전한 주거 지역이어서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머릿속은 늘 온통 회사 일로 가득 차서 집안일로 걱정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요즈음 젊은 직장인들을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가정보다는 당연히 회사가 우선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살았다.
어느 날 출장을 다녀와서 도둑이 들었었다는 얘기를 아내에게서 듣자, 정신이 멍해졌다. 아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주방에 내려가 보니 리놀륨 바닥에 피우다가 꽂아놓은 담배꽁초가 보였고, 냉장고에서 꺼내 먹은 음식 찌꺼기가 담긴 그릇이 보였고, 구석에는 싸 놓은 대변이 있더라고 했다. 침실 건넌방에 있던 장롱의 서랍은 모두 열린 채 어지럽혀져 있었는데 훔쳐 간 물건은 없더라고 했다. 사람이 다치지 않았고, 잃은 물건도 없어서 다행스럽기는 했지만, 도둑이 가져갈 물건이 없었다는 게 좀 부끄러웠고 가슴 졸이며 몰래 들어와서 열심히 뒤졌지만, 소득 없이 빈손으로 돌아간 도둑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도둑님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회사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어떤 직원이 도둑이 대변을 싸 놓는 건 그렇게 하면 잡히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그 직원은 도둑도 아닌데 그걸 어찌 알았을까?
버나드 쇼 영감님은 “훔친 사람이 도둑이 아니라, 잡힌 사람이 도둑이다.”라고 했다는데, 찬밥 한 덩이 말고는 훔친 물건이 없고, 잡히지도 않았으니 우리 집을 찾은 불청객은 도둑이 아니라 손님이라고 불려도 괜찮을 듯하다. 그나저나 그 손님은 빈손으로 떠나며, 얼마나 허탈했을까?
며칠 후 대량으로 밀려 들어오는 냉장고를 보관할 공간이 모자라서 대전 서비스 센터의 부근에 있는 작은 창고의 주인을 만나서 임대차 계약을 하는 자리에서 그 밤손님 얘기를 꺼냈더니 그분 말씀이 “빈손으로 떠난 밤손님이 너무 딱하다. 뭐든 집어 갈 만한 걸 좀 두시지 않고서……” 얼마나 놀랐느냐고 위로하기는커녕 허락도 없이 내 집을 찾은 밤손님 편을 드니 섭섭하기는 했지만, 냉장고 수리 공간 확보를 위해 임시로 창고가 필요하다는 내 말에 좋은 일 하는 데 쓸 공간이니 파격적인 월세로 계약해 준 터라 밤손님 편을 드는 그분에게 화도 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얼마 후에 우연히 알고 보니 창고 주인은 성당에 다니며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는 신앙심이 깊은 분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믿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감탄하다가, 밤낮과 평일, 휴일 구분 없이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성당에 발을 끊은 지 오래된 내가 부끄러웠지만, 대전에서 지내는 동안 성당에는 한 번도 나갈 수 없었다.
지금도 우리 집에는 도둑이 들어도 집어 갈 만한 귀중품이라는 게 없다. 그래서 낮에 외출할 때는 다시 문 여는 게 귀찮아서 아예 문을 잠그지 않는다. 그러니 “도둑님들 제발 우리 집은 찾지 마셔 그래 봤자 헛수고 하는 거요.”
(2023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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