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41년 전 오늘 밤

삼척감자 2022. 12. 11. 22:45
41년 전 오늘 밤 주재원으로 발령받고 JFK Airport에 도착했다. 주재원 발령을 승진 이상으로 여기던 때라, 다들 그만하면 강원도 촌놈이 출세했다고 했지만, 출세는 개뿔! 그날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날이었다. 한국에서 70여명 직원을 거느리고 출세한 듯 착각하며 지내던 좋은 세월은 끝나고 현지 채용한 여직원 딸랑 네 명만 모시고 일하기 시작한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미국에 오기 직전까지는 회사에서 제공한 사택에서 지내며 충성심 강한 직원들 덕분에 편히 지내다가, 잘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분주하게 쫓아다니며 월세 아파트를 구하려니 후회가 밀려 왔다. “괜히 왔구나.”
그로부터 3개월 후 아내와 두 딸이 내 뒤를 따라 미국에 입국했다. 그때 나는 서른두 살, 꽃다운 나이였고, 두 딸은 각각 한 살, 세 살이어서 천지를 분간 못 할 때였다. 나이 서른이 채 안 된 아내는 물색 모르고 잘난 남편 덕에 미국 구경한다고 흐뭇해했으나 나는 업무가 주는 중압감에 짓눌려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만 부르짖었다. “나 다시 돌아갈래!”
며칠 동안 시차 부적응으로 밤낮 구분이 안 되어 밤에는 놀고 낮에는 자던 딸들도 눈 깜뻑할 사이에 40년 세월이 흘러 40대 초반,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아비에게는 아직도 예쁜 아가씨들로 보이니 이 못 말리는 딸바보 기질은 죽을 때까지 치유되지 않을 듯하다.
딸들은 어려서부터 제 앞길을 잘 가리더니 명문 대학 졸업, 일류 기업체 근무 그리고 경제적 안정까지 이루었으니 이제는 그만하면 잘 나가는 편인데, 나는 미국 입국할 때부터 헤매기 시작하여, 아직도 헤매고 있다. 나의 미국 생활은 행복하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다. 그래도 행복할 때가 더 많아서 그런대로 살만 했다. 산다는 게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이제는 고달픈 밥벌이의 노역에서 해방되어 한가로이 세월을 죽이며 살지만, 허허로운 기분은 늘 떠나지 않는다. 이게 아마도 계절 탓이겠지. 내가 한국에서 보낸 세월보다 미국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더 오래 되었고 평생 늙지 않을 것 같던 미남자는 볼품없는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다. 예쁘던 우리 마님은 영락없는 할멈이 되어버려서 아프다고 골골거린다. 나중에 누구에게나 닥친다는 그때가 오면 미국 땅에 뼛가루를 남기게 되겠지?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는 아끼던 소주병을 까서 한잔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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