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음치로 살아가기

삼척감자 2022. 9. 6. 03:19

어릴 적부터 별로 신통치 않던 내 노래 실력이 변성기를 거치며 엉망이 되어 버렸다. 고등학교 때는 가창으로 치르던 음악 시험에서는 늘 반에서 유일하고도 최하인 점수, 55점을 받아서 석차를 떨어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회사에 입사하고는 회식에서는 밥 먹기, 술 먹기가 대강 끝나면 으레 노래판이 벌어졌는데 그때마다  곤혹스러웠다 순서가 지나가기를 바라며 일없이 화장실을 들락거리기도 했지만 영악한 동료는 나를 빠뜨리는 일이 없이 한사코  노래를 들으려고 했다맨정신에 노래하기란 어려워서 노래 부를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연방 술을 들이켜기도 했다.

 

어렵게 노래를 부르면 듣고서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나만 빼놓고그럴 때마다 마음이 상해서   먹고 좋은 분위기에서  놀다가도 기분이 엉망이 돼버렸다노래를  부르겠다고 아무리 핑계를 대어도 상사와 동료가 강제로 권하는 데야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노래가 나옵니다쿵다라닥닥  나오면 쳐들어간다쿵다라닥닥어쩌고저쩌고…” 하며 억지로 시키고는 웃고놀리고 하는 그런 모임이 정말 싫지만한국적인 조직 문화에서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싫다는 데도 부른다는 데도 거의 강제로 노래를 시키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 담당 임원을 모시고 업무부와 수출부의 합동 망년회가 열렸는데 회식이 거의 끝날 무렵 Y상무가 구두 한 짝을 벗어들더니 거기에 술을 가득 부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구두 속을 벅벅 문지르며, “내가 무좀이 있어서 소독해야 하거든. 우선 당신부터 마셔라며 옆에 앉은 K부장에게 건넸다. 술잔, 아니 구두 잔이 몇 사람을 지나며 바닥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무좀균이 가득한 술을 마실뻔 했다.

 

이어서 돌아가며 노래 부르기가 시작되자 음치인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도망갈 수도 없었고 다가올 차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어 노래했더니 높으신 분이 아무 말 없이 몇 초 동안 나를 노려보는데 기분이 쌔 했다. 박수도 없었고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기분이 개떡 같았다.

 

주재원으로 미국에 오고 나서는 강제로 노래 부를 일이 거의 없어져서 좋았다. 예전에 어떤 사람은 미국에 오니까 좋은 점으로 예비군 훈련을 안 받아도 되는 걸 첫손가락에 꼽던데, 나는 회식 자리에서 강제로 노래하지 않아도 되는 걸 꼽았다.

 

노래방 기계가 진작에 있었더라면 직장 회식도 즐길 만 했을 텐데. 다들 화면만 쳐다보느라 노래하는 사람에게 관심조차 없을 테니까. 회식 자리에서 드물게 보는 술 못 마시는 사람의 고초도 대단할 것 같았다. 술 마시는 시늉만 하며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을 보면 안쓰러웠다. 술 못 마시는 사람과 음치, 둘 중에 누가 회식 자리에서 더 괴로울까?

 

(2021 8 25)

'시간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41년 전 오늘 밤  (1) 2022.12.11
특허 분쟁에 대처할 자료를 찾으러  (0) 2022.09.07
옛날에 금성사 특허과에서  (0) 2022.09.06
옛날 서비스 차량 운전기사 이야기  (0) 2022.09.06
쓸데없이 돈을 쓰다니  (0) 2022.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