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전화기 화면 너머의 온기

삼척감자 2026. 4. 4. 21:30

16시간의 비행. 숫자로만 들으면 막연하지만, 그 시간을 견뎌야만 만날 수 있는 거리라 생각하면 새삼 세상이 넓음을 실감한다. Los Angeles에 사는 작은딸과 외손자가 덴마크 코펜하겐에 머물고 있는 큰딸 가족을 찾아갔다. 외손자는 봄방학이었고, 작은딸은 휴가를 내었다. 사업 확장 준비로 바쁜 작은사위는 함께하지 못했다.

 

긴 여정 끝에 마주했을 그들의 상기된 표정을 떠올려 본다. 노인들에게 있는 건 시간뿐이라지만, 아이들끼리 더 편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집에 남았다. 괜히 우리가 끼어들면 그들만의 오붓한 시간에 부담이 될까 싶어서였다. 그렇지만 한자리에 모이지 못한 아쉬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가족이란 함께 있을 때보다, 오히려 함께하지 못할 때 그 빈자리가 더 또렷해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먼 나라에서 만난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화상 통화가 걸려 왔다. 화면 속 풍경은 참 따뜻했다. 사촌들은 금세 한데 엉켜 웃고 장난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음에도 아이들은 조금도 낯설어하지 않았다. '사촌'이라는 관계는 시간과 거리를 가볍게 뛰어넘는 신비로운 힘을 지닌 모양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화면을 넘어 우리 집 거실까지 잔잔히 번졌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지고, 집 안 공기가 한층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큰딸 가족은 6월까지 덴마크에 머문다고 한다. 낯선 타국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그 시간을 알차게 꾸려 유럽 곳곳을 부지런히 다니고 있다니 이야기를 듣는 나도 덩달아 마음이 들뜬다. 작은딸네가 미국으로 돌아가면 큰딸 가족은 곧 파리로 떠날 예정이고, 이미 독일과 로마, 스웨덴을 다녀왔다니 그 발걸음이 참으로 바쁘다. 때때로 보내오는 사진 속에는 낯선 풍경과 익숙한 얼굴이 조화롭게 담겨 있다. 오래된 유적지 앞에 선 아이들의 모습, 이국적인 거리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 또한 그 길 위에 함께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문득 3년 전이 떠오른다. 아내의 칠순을 맞아 캐나다 큰딸 집 근처 호숫가에 모두 모였던 시간. 그날은 유난히 햇살이 부드러웠고, 물결 위로 부서지던 빛줄기가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았다. 아이들은 물가를 뛰어다니며 깔깔거렸고, 어른들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았던 날.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만했던 시간이었다. 그때 우리는 한자리에 있었고, 서로의 온기를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진 속에 고스란히 박제된 그날의 공기가 여전히 생생하다.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당시의 냄새와 소리까지 함께 되살아나는 듯하다.

 

언젠가는 다시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것이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그리움의 시간을 건너간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이어진 마음은 그 어떤 물리적 거리도 가뿐히 넘어서리라는 것을 오늘도 조용히 깨닫는다.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이 떨어져 있는 시간이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다.

 

(2026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