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형탄절(炯誕節) 아침에

삼척감자 2023. 3. 26. 20:39

오늘은 형탄절이다. 성탄절이 아니고, 웬 형탄절? 김형기(金炯基)라는 사람이 탄생한 날을 형탄절이라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른담. 손꼽아 세어보니 오늘이 만으로 일흔네 살 되는 날이다. 인제 와서, 한 살 더 먹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커서 훌륭한 인물이 될 거도 아니고, 백 살까지 살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나이 드니 편한 게 참 많다. 그 중 하나만 꼽으라면, 매일 뭔가에 끌려가지 않고 내 마음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거다.

 

어저께 저녁 무렵 구수한 고기 익는 냄새가 나기에 아내에게 내 생일은 내일인데 벌써 잔치 준비를 하느냐고 핀잔을 줬더니 형탄절 전야제 준비를 하는 거란다. 저녁 밥상을 보니 큰 그릇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영계백숙이 올라와 있었다. 그걸 보니 아름다운 여인의 나신이 연상되었으니, 난 아직도 젊은가 보다. 행여나 주책바가지라고 흉보는 사람이 있을까? 아내에게 아예 생일 후 팔일 축제(성탄절과 부활절 후에 치르는 가톨릭 전례 기간)도 치르자고 했다.

 

생일 저녁은 집에서 간단히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와 와인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이름은 오묘해도 올리브 오일에 마늘 편을 잔뜩 올리고 볶아서 삶은 파스타 넣고 뒤섞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요리다. (내가 만들어 봐서 아는데) 말린 고추도 찧어서 넣고 조갯살을 넣기도 하고 치즈를 갈아서 뿌리기도 한다. 면이 기다란 파스타 요리를 먹으면 오래 살 것 같아서 미역국 대신 그걸 먹기로 했다. 자식들의 생일 때마다 국수를 준비하던 어머니가 백 살까지 사셨으니 그게 효험이 있겠지.

 

다시 손꼽아 세어 보니 언제 세상을 떠날지는 몰라도 분명히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는 엄청나게 짧다. “아이고 이 영감탱이아 그걸 꼭 헤아려 봐야 아나?”라고 누군가가 핀잔 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02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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