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꿈은 이루어진다니까

삼척감자 2023. 1. 25. 06:58

나이 일흔을 넘어서고는 주량이 무척 준 걸 느끼게 된다. 주량이 준 건 나이 탓도 있지만, 50대 후반에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극적으로 줄었다. 사고 후 병원에 반년 동안 입원했다가 퇴원 후 두어 달 지나고 나서 술잔을 식탁에서 내 입으로 운반하는 팔운동을 다시 시작했으니 여덟 달 남짓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한 셈이다. 오랫동안 굶었던, 그리운 술이었는데도 처음에는 그리 반갑지 않아서 두어 모금 마시는 정도로 그쳤으니 아무래도 쇠약해진 몸 탓에 그랬던 것 같다.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주량은 그다지 늘지 않아 지금도 소주 한 병이면 알딸딸해져서 더는 마실 생각이 없어지니 이제는 술꾼이라는 말을 듣기에는 어림도 없다. 원 없이 술을 마시다가 건강을 해쳐서 쉰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게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다 오랜만에 딸들 집에 가면 소파나 식탁 앞에 앉자마자

큰딸은 “Red or White?”라고 묻는다.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꽤 비싸 보이는 프랑스 와인이나 사위가 즐기는 Malbec 와인을 따라 주고, 때로는 집에서 만들었다는 수제 맥주를 권하기도 한다.

작은딸은 와인 전용 냉장고에 모셔 둔 수십 병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하거나, 소주나 막걸리를 권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건강 걱정은 까마득히 잊고 얼른 한 잔을 들이켜면 딸들은 얼른 한 잔을 또 따라준다. 이게 소박한 환영식이기도 하지만, 맨정신에는 입에 지퍼를 잠근 것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아비가 술 몇 잔이 들어가면 말문이 트이고 기분이 좋아지는 걸 알기 때문에 앉자마자 술부터 권하는 거다.

 

수십 년 전 삼십 대 후반의 나이일 때 가족 모두 독일의 처형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반주로 내놓은, 병에 동전 그림 여섯 개가 찍힌 생맥주가 어찌 구수하고 입에 당기던지 거기에 머무는 동안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생각날 때마다 냉장고에서 꺼내서 마셨다. 그리 짜지 않은 독일산 소시지와 치즈 안주와 생맥주가 어찌 그리 잘 맞던지 계속 마셔대었으니 거기 있는 동안 늘 취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처형이 좀 기가 막혔던지 한마디 했다.

술통에 긴 호스를 연결해서 김 서방 입에 넣어주면 편하겠구먼.”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수도꼭지에서 물 나오듯이 언제나 맥주를 마실 수 있고, 연신 술 가지러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좋고, 그야말로 나 편하고, 처형 편하니 참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리고 내가 마시면 얼마나 마신다고. 그래서 술 자동 공급 시스템은 꿈으로만 간직하기로 했다.

 

매달 캐나다에서 뉴저지로 출장으로 오는 큰딸이 이번에는 떠나기 전날 맨해튼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한 후 밤늦게 우리 집에서 자고 다음 날 바로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밤 열 시가 훌쩍 넘어 빗길을 달려 온 딸이 여행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는데, 우리에게 줄 물건과 안줏거리 두어 가지 그리고 낯선 종이 상자가 있었다. 안줏거리로 준비한 훈제 연어도 반가웠지만, 네 병 정도의 레드 와인이 들어 있다는 Box Wine이 제일 반가웠다. 당장 한잔하겠다며 술잔을 꺼내는 나에게 아내는 아침 일찍 떠날 딸을 생각해서 술은 마시지 말라며 눈총을 주었지만, 아무리 마님 눈치를 보며 지내는 나지만 딸 앞에서 맛있게 마시면 딸이 기뻐할 거라는 생각에 서둘러 안주와 술잔을 꺼내고 딸은 술 따를 준비를 했다.

 

딸이 와인 박스 아래쪽에서 술 나오는 꼭지를 꺼내는 걸 보니 마음이 바빠졌다. 잠시 후 수도 꼭지 처럼 생긴 게 박스 바깥으로 튀어나오고, 빨간색 손잡이를 누르니 와인이 졸졸 흘러나왔다. ‘빙고이게 바로 내가 꿈꾸던 누르면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자동 술 공급장치렸다. 꿈은 이루어진다더니 이 나이에 오래 전에 꿈꾸던 게 이루어진 셈이다.

 

딸이 떠나고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와인 박스에는 술이 넉넉히 남아 있다. 뒤늦게 술을 배워서 내가 마실 때마다 개평 뜯듯이 술을 청하는 우리 마님과 함께 마셨는데도 그렇다. 그거 봐! 내가 뭐랬어? 내 주량이 지금은 보잘것없다니까. 아직도 나를 술꾼으로 생각하는 분은 이 글을 읽고 술꾼 명단에서 내 이름을 빼 주소서.

 

(202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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