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쁜 소식(bad news)이라고 하는 건, 그것이 골치 아픈 일이거나 문제를 일으킬 거라는 의미이고, 좋은 소식(good news)이라고 하는 건, 그것이 유익하거나 도움이 될 거라는 의미가 있다. 미국인들은 나쁜 소식을 전할 때 “나쁜 소식은 ~이고, 좋은 소식은 ~입니다.”라고 말하거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떤 걸 먼저 듣겠소?”라고 묻는 걸 자주 본다. 나쁜 소식이더라도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자는 낙관적인 사고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돌려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런 표현이 일상에서 널리 사용되어 이에 관한 유머도 수없이 많은데, 몇 가지만 골라서 아래에 소개한다.
산부인과 의사와 분만하러 온 임산부의 대화
의사: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요, 어떤 걸 먼저 들으실래요?”
임산부: “나쁜 소식부터 먼저 들려주세요.”
의사: “아기에게 심각한 장애가 발견되었습니다.”
임산부: “맙소사. 그런데 좋은 소식이란 뭐지요?
의사: “아기가 자궁 안에서 이미 사망한 상태입니다.”
의사: “좀 나쁜 소식과 몹시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환자: “좀 나쁜 소식이란 뭐죠?”
의사: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선생님은 24시간밖에 못 살 거라고 합니다.”
환자: “24시간이라니요? 그것만으로도 끔찍한데 몹시 나쁜 소식이 또 있다니요?”
의사: “어제께 검사결과를 알려 드리려고 계속 전화했지만, 이제야 연락이 닿았답니다.”
방송에서 뉴스진행자가 “나쁜 소식을 말씀드립니다. 어저께 호텔에서 일어난 사고로 50명이 사망했습니다. 좋은 소식은 우리는 그 호텔에 투숙하지 않았다는 겁니다.”라고 한국에서 이런 식으로 화재 소식을 전한다면 사망자 유족들에게 두들겨 맞을 것 같은데 미국에서는 가끔 이런 식으로 얄밉게 말하는 진행자를 볼 수 있다.
내게도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을 한꺼번에 전한 의사가 있었다.
10여 년 전에 일어난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는 절단했고, 오른쪽 다리는 크게 망가졌다. 여덟 군데나 부러진 오른쪽 다리를 쇠막대기 여러 개로 얼기설기 엮어놓고 깁스를 한 채로 지내는 동안 꼼짝없이 반듯하게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아홉 달 동안 그렇게 지내다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떼어 냈지만, 발과 다리의 신경이 많이 손상되어서 발을 아래위로 움직일 수 없었고 다리 아래쪽에 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신경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갔더니 검사를 맡은 의사 중 한 명이 젊고 잘 생긴 한국인이었다. 가운에 붙은 이름표를 보니 MD(의학박사) & Ph. D(철학박사) Kim이라고 적혀 있었다. 남들은 하나도 받기 어려운 박사학위를 두 가지나 가진 똑똑한 의사였다. 그와의 대화는 영어로만 이루어졌다.
엎드린 상태에서 한 시간 이상 실시된 신경 검사는 고통스러웠다. 전선이 연결된 기다란 바늘 두 개를 다리 깊숙이 찔러놓고 전기 자극을 주며 전류를 측정하는 검사였는데 자극이 매우 강해서 마치 고문을 받는 것 같았다. 바늘의 위치를 여기저기로 바꾸어 가며 다리 구석구석을 바늘로 찔러대며 전기 충격을 주니 왜 그러지 않았겠는가?
검사가 끝나고 한참 지나서 검사 결과가 기록된 종이를 들고 들어온 그가 말했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나쁜 소식은 다리의 신경이 많이 손상되었다는 겁니다. 좋은 소식은 신경이 아주 천천히 자라고 있는 걸 확인한 겁니다.”
“다리 신경이 완전히 회복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라고 아내가 그에게 물었더니,
“지금 이 상태에서는 30년 정도, 아니 그 이상 걸릴지도 모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검사를 받으러 갔던 나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으로 알아듣고 바로 체념했다. 그리고 인상 좋아 보이던 그가 갑자기 얄밉게 보였다.
검사를 받은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내 오른쪽 다리는 전혀 나아진 게 없다. 샤워하며 뜨거운 물에 닿아도 그걸 느낄 수 없고, 발을 아직도 들어 올릴 수 없다. 의사 말대로라면 30% 정도는 기능이 회복되어서 자동차 운전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 말이다. 하기야 20년 정도 더 기다려서 나이 90 정도에 신경이 회복된들 그 나이에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니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나는 어쩌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라는 구절을 보거나 들으면 그게 어쩐지 얍삽한 말장난으로만 느껴진다.
(2018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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