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집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병원에 다녀왔다. 당뇨 합병증이 심해서 얼마 전에 왼쪽 다리를 절단한 친구 문병을 위해서였다. 눈물이 흔하고 마음이 여린 그 친구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뜻밖에 평온한 표정이어서 다행스러웠다. 무릎 아래쪽이 절단된 그를 보니 한쪽 다리가 그보다 더 많이 잘린 나지만 섬뜩했다. 그래서였는지 다리가 절단된 후 내가 오랫동안 겪은 고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걸을 때까지 나이 일흔이 다 된 그가 거쳐야 할 힘든 과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남아 있는 무릎 아랫부분이 충분히 길어서 의족을 끼고 재활 훈련을 받으면 정상적인 다리 기능의 80~90%는 회복할 수 있을 거니 그만해도 그게 어디냐고 위로했더니 그가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오는 사람마다 내 형편이 자네보다 훨씬 낫다고 하데.” 맞는 말이기는 하다. 수술 후에 바로 먹고 마실 수 있고, 기운도 떨어지지 않았고, 말도 할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무엇보다도 무릎 아래 한참 밑으로 잘렸으니 잘만하면 그가 좋아하는 골프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거니까 그리 절망할 일은 아니다.
우리 성당 신자들이 환자를 방문하면 자주 하는 말이 있다고 들었다.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김모 씨를 생각해 봐라.”
“당신의 고통은 김모 씨보다 덜하지 않은가?”
“김모 씨가 고통을 이겨냈듯이 당신도 이겨낼 수 있을 거다.”
그런 말을 전해 들을 때마다 쑥스럽다. 내가 엄청난 고통을 강인한 의지로 이겨낸 영웅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냥 동물적인 본능으로 죽지 않으려고 헐떡거리다가 주위 분들의 기도와 주님의 은총으로 운 좋게 살아난 나약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 뭇 환자의 멘토인 것처럼 인구에 회자되는 게 정말 민망스럽다.
그런데 환자 앞에서 큰 고통을 겪었던 다른 이에 관해 얘기하는 게 그 환자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속담에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라는 게 있다. 남의 큰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관계없는 일은 대단하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에 쓰는 말인데 참 인간적이고 솔직한 표현이다. 남이 아픈 것은 자기가 느낄 수 없지만 내가 아픈 것은 아주 작은 아픔도 금세 느끼기 때문에 남의 염병보다 내 감기가 중한 것은 당연하다.
집에 돌아와 욥기를 찾아 읽으니 다음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욥의 세 친구가 그에게 닥친 이 모든 불행에 대하여 듣고, 저마다 제 고장을 떠나왔다. 그들은 욥에게 가서 그를 위안하고 위로하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욥기 2장 11절)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욥과 친구들 간에 벌어진 긴 논쟁을 읽어보면 친구들의 위로는 결코 욥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욥에게 큰 상처만 안겨주었다.
환자를 방문할 때 나는 pity가 아닌 sympathy의 마음을 가지려 애쓴다. 두 단어는 한국어로는 비슷하게 번역된다. 그러나 pity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지만, 상대를 낮추어 보는 마음도 포함되나 Sympathy는 그리스어 어원의 syn-(함께)과 path (마음)가 결합하여 ‘상대방과 같은 마음’이라는 의미가 있다. 물론 아픔도 함께하려는 마음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재활원에 입원했을 때 보니 주위에 팔다리가 절단된 환자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궁금해서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매년 팔다리를 자르게 된 환자들이 무척 많았는데(미국에서만 매년 185,000명이 지체 절단) 그 중에서 사고로 잘린 사람들은 16% 정도로 생각보다 비율이 높지 않았는데 당뇨 합병증으로 잘린 사람들은 82%였다. 그러니까 지체 절단 환자의 대부분이 당뇨 합병증으로 그런 일을 당한다니 당뇨가 참 무섭기는 하다.
(2017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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