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문 기사를 보면 ‘모세의 기적’이라는 표현을 이따금 볼 수 있다. 구급차가 지나가는데 길거리의 차들이 모두 양쪽 갓길로 비켜줘서 구급차가 쉽게 지나갈 수 있었다는 보도를 할 때 이런 표현을 쓴다. 당연히 그리 해야 하는 일인데 기적이라는 표현을 쓴 걸 보면 한국에는 구급차에게 길을 비켜주지 않는 차들이 많은가 보다.
미국에서는 구급차의 경광등이 멀리서 보이거나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구급차 진행 방향 양쪽의 차들이 모두 일제히 길을 비켜 준다. 그게 미담이 아니고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니 모세의 기적이란 표현이라기보다는 밀물이나 썰물 정도로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같다. “하느님, 생사의 갈림길에서 촌각을 다투는 환자에게 길을 비켜주지 않는 인간들에게도 구급차 탈 일이 일어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면 저주가 되겠지? 그런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지도 않을 테고.
생사의 갈림길에 선 사람이 구급차를 기다릴 때의 심정은 어떨까? “구급차 오기를 기다리네 / 너무 늦게 오지 않으면 좋으련만 /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네 / 도움의 손길이 다가오네”라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교통사고를 당하고 길바닥에 쓰러져서 구급차를 애타게 기다릴 때 내 심정이 그랬다. 그리고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듣고 반가워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구급차에 오르고 얼마 후 내가 탄 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의식을 잃었다. 그러고 깨어난 게 사고 난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리고 또 한 달 후 재활원으로 이송되며 구급차를 탔다. 타기 전 차 밖에서 잠깐 기다리는 동안 석 달 만에 햇볕을 쬔 피부는 따갑다고 아우성이었고, 산소 호흡기를 뗀 그 잠깐 사이에 허파는 숨이 가쁘다고 아우성이었다. 구급차에 타자마자 산소통을 연결하여 허파 가득 산소가 차니 이제 살았다 싶었다. 구급차 안에서 “이제 나는 어디로 가나? 이렇게 장애인으로 희망 없이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막막했다.
후속 진료를 받으러 재활원에서 병원으로 갈 때마다 구급차를 이용하며 구급차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이 그리웠다. 하루빨리 집에 가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퇴원하고 아파트 복도에서 의족을 끼고 걷는 연습을 하다가 넘어져서 가까스로 절단을 면했던 오른쪽 다리가 또 부러졌다. 지독한 통증을 견디며 너덜거리는 다리를 보고 절망했다. “하느님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도 잘라야 합니까?” 병원으로 실려 가며 구급차 창으로 보이는 밤거리 풍경은 나와 상관없이 평온했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또 몇 달 동안 깁스를 하고 아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구급차 요원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다. 들것에 환자를 싣고, 묶고 구급차에 올리고 구급차 안에서 응급조치를 냉정하게 보일 정도로 침착하게 처리한다. 처음에는 그게 참 얄미워 보였는데 여러 차례 이용하다 보니 그들의 그런 모습이 참 미더웠다.
사고 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가끔 길거리에서 경광등을 켠 구급차가 멀리서 다가오는 게 보이면 아내를 재촉하여 서둘러 차를 갓길로 뺀다. 그리고 속으로 화살기도를 바친다. “주님, 저 환자를 구하소서.”라고.
구급차로 실려 가는 환자나 가족이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 (이사 41, 10)”라는 주님 말씀에 의지하며 힘을 얻으면 좋겠다.
(2018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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