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반년이 지난 2005년 연말,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이었다. 병상에 누워있는데 병원 복도 저 끝에서 들릴 듯 말 듯 노랫소리가 들렸다.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귀 기울여 들어 보니 한두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아마 부근 교회의 성가대가 방문했나 보았다. 노랫소리는 차츰차츰 가까이 다가왔는데, 그들은 병실마다 들러서 노래하는 것 같았다.
Round yon Virgin, Mother and Child,
Holy infant so tender and mild,
해마다 듣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지만, 다리가 절단되어 하루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던 환자 신세로 듣던 그 노래는 평생 처음 들어 보는 노래처럼 새롭게 다가왔다. 입으로 음식을 삼키지 못해 먹지 못하던 때라 노래조차 ‘고요한 밥, 거룩한 밥’으로 들려서 서러웠다. 참 배고팠다. 거창한 음식이 아니라 옆 병상의 환자가 먹고 마시던 계란부침이나 오렌지 주스라도 배불리 먹고 싶던 때였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람.”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느덧 성가대가 내 방에 왔다. 몇 명은 병실에 들어오고, 대부분은 복도에 서서 노래했는데 열 명이 훨씬 넘는 것 같았다. 그들은 ‘Silent night, holy night!’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고 떠났다.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노래를 들으며 서럽던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성대가 망가져서 말을 할 수 없던 때라서 “Thank you.”라는 말도 못 하고 겨우 손 흔드는 거로 감사의 뜻을 표했지만, 일부러 병실을 찾아준 알지도 못했던 미국인 성가대가 정말 고마웠다. 나는 ‘Celtic Woman’이 부르는 크리스마스 음악을 좋아하지만, 그들의 노래도 오래 전 병실에서 들은 무명 성가대의 ‘Silent night, holy night!’만큼의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성가대가 방문하고 며칠 후 성대 수술을 마치고 말하고 먹고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해 12월 31일에 퇴원하고 오랜만에 집으로 와서 휠체어로 움직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루하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의족을 끼고 쌍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어서 그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는 걸어서 미사에 참례할 수 있게 되었다.
해마다 성탄 무렵에 ‘Silent night, holy night!’을 들으면 오래 전 병실에서 그 노래를 듣던 때가 생각난다. 서러웠지만, 하느님의 은혜를 느꼈던 그때가.
노래할 수 있다면 나도 그들처럼 병원을 방문해서 외롭고 서러운 환자들 앞에서 ‘Silent night, holy night!’을 불러주면 좋겠지만, 태생 음치인 데다가 목소리 내는 것조차 때로는 힘겨운 나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2017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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