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주일 아침에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면도하다가 깜빡 방심한 사이에 의족의 무릎 부분이 꺾여서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행히 어디 부딪친 데는 없었다. 변기를 짚고 혼자 일어서 보려고 끙끙거렸지만, 애당초 무리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큰 소리로 아내를 불러 도움을 청했지만,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도 없는 나 자신이 초라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 언제부터 이리 꼬여 버렸나?
사고로 다리를 잃고 의족을 낀 이후로 그런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처음 의족을 낀 날 아파트 복도에서 아내의 도움을 받아 걷는 연습을 강행하다가 넘어지며 절단하지 않은 다리뼈가 부러져서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가느라 소란을 떨었고, 그 이후 뼈가 아물 때까지 서너 달 동안 고생했다. 두어 해 전 겨울에 성당 체육관 뒷문으로 걸어 나오다가 쌍지팡이 바닥이 얼음에 미끄러지며 넘어졌는데, 그때도 혼자 일어날 수 없어서 휴대폰으로 베드로 형제를 불러서 도움을 받았지만, 엉덩이에 주먹만 한 멍이 생겼었다. 여러 해 전에도 집에서 의족을 끼지 않은 채 외다리로 일어서다가 넘어지고 또 먼저 주일 아침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혼자 힘으로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내가 참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의족을 끼고 서 있거나 걸을 때는 허벅지를 뒤쪽으로 지긋이 힘주어 밀어주기만 해도 안전한 데,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그걸 잊으면 의족의 무릎 부분이 꺾이며 넘어질 수 있으니 늘 의족에 집중하여 딴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요컨대 ‘방심은 절대 금물.’이라는 얘기다. 넘어질 때마다 어이가 없고, 기막히고, 때로는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날 성당에서 돌아오는데 갑자기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주인공 슬레이드와 용돈을 벌기 위해 임시로 그를 돌보던 고등학생 찰리가 주고받던 대화가 떠올랐다.
사고로 시력을 잃은 예비역 중령 슬레이드를 돌보던 고등학생 찰리가 권총으로 자살하려던 슬레이드를 제지하자 슬레이드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한 가지만 대봐.”
“두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중령님은 탱고를 잘 추시잖아요.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본 어느 누구보다도 (조금만 도와 드리면) 페라리(=최고급 승용차)를 잘 몰잖아요.”
이 말을 듣고 찰리를 권총으로 쏴 죽인 다음 바로 자살하려던 슬레이드는 생각을 바꾸게 된다.
나는 춤이라고는 전혀 출 수 없고, 운전도 못 하지만 슬레이드보다 잘할 수 있는 걸 꼽으라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것 같다. 내 가족에게 내가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대라면 아마도 수없이 말하지 않을까? 아마도 딸들은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아빠, 넘어졌다고 기죽지 마세요. 우리가 아빠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 아시잖아요.”
맞아. 그래서 난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야.
(2015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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