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오래된 레시피

삼척감자 2024. 9. 30. 11:10

우리 어릴 적에는 남자가 부엌에 들락거리면 사내 녀석이 그러다가 X알 떨어진다며 어른들이 야단쳤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도 바뀌었거니와 사는 곳도 미국이니 남자가 부엌에서 주부의 일을 도와주면 자상한 남자라고 칭찬을 받을지언정 흉잡힐 일은 아니다.

 

나도 나이 들어가며 부엌 출입이 잦아졌다. 배꼽 밑의 호두 알 두 쪽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할아버지 노릇에는 별로 지장이 없거니와 어쩌다 성당에서 행사가 있거나 교육에 참석할 일이 있어서 아내가 집을 비우더라도 혼자서 간단한 음식이라도 차려 먹어야 하기에 생존에 꼭 필요한 정도로, 예를 들면 라면이라는 음식 정도는 직접 끓여 먹는다.   

 

부엌 출입을 시작하며 라면 끓이기로 시작한 내 요리 솜씨는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그다지 진전이 없다. 라면이라야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이것저것 냄비에 집어넣고 끓인 잡탕 라면으로 그럭저럭 먹을 만하지만 명품 라면과는 거리가 멀다. 가끔 비빔 국수도 만들어 먹지만, 고추장만 잔뜩 넣어서 맵기만 할 뿐, 아내가 만들어 준 감칠 맛 나는 비빔 국수와는 거리가 멀다.

 

가끔 어릴 적에 먹던 강원도 동해안 토속 음식이 생각날 때가 있다. 대체로 싱겁고 양념을 그리 넣지 않는 충청도 음식에 익숙한 아내에게 아무리 내가 어릴 적에 먹던 토속 음식을 설명하고 만들어 주기를 청해도 먹어 보지 않은 음식을 만들어 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러면 내가 인터넷을 뒤져서 찾아낸 레시피를 들여다보며 그런 음식 만들기에 몇 차례 도전해 보았지만, 어릴 적 그 맛을 되살리기란 어렵다.

 

이번에도 고향 음식이 생각나서 인터넷으로 찾아낸 레시피에 나온 재료를 이것저것 준비한 다음, 씻고, 자르고 손질하고 큰 양푼에 몽땅 쏟아 넣고 양념도 뿌리고 맨손으로 조물조물 열심히 버무려서 맛을 보니 며칠 숙성시키면 훌륭한 작품이 완성될 것 같았다. 고향 음식을 만든답시고 혼자서 온갖 요란을 떨고, 그릇을 씻은 다음에, 레시피를 잘 보관해 두려고 서랍의 레시피 모음 폴더를 꺼내다가 그 안에 있던 큰딸의 메모가 눈에 띄었다. 영어가 아니고 한글로 또박또박 쓴 메모와 함께 내가 즐겨 만들어 먹는 ‘Linguine alle vongole’의 레시피가 있었다.

 

“2006 9 27

 

사랑하는 아빠에게,

 

이 레시피 생각나지요?

Rahway(지금 사는 곳)로 이사 갈 때 내가 챙겨서 갖고 있었어요.

다시 아빠에게 보내니 언제 또 한 번 음식을 만들어 보세요.

 

큰딸

 

큰딸이 이 메모를 쓰기 일 년 전에 나는 교통사고로 서너 달째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다리 하나를 절단하고, 목소리를 잃고, 음식이라고는 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는 상태로 병상에 누워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때였다. 때마침 전에 살던 아파트의 계약이 끝날 때가 되었는데, 딸 내외와 아내가 다리 하나를 잃은 나를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는 아파트에 그냥 살기보다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로 옮기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이삿짐을 싸다가 내가 모아 둔 이 레시피를 본 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아빠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지, 다시 걸을 수 있게 될지, 앞으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지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서툰 솜씨로 딸들에게 조갯살을 넣은 이탈리아 국수 요리를 해 주던 아빠의 모습을 그리며 이 레시피를 챙겼을 큰딸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일 년이 지나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걷는 연습을 하며 재활훈련을 하는 나를 보고 큰딸도 다시 희망을 품게 된 듯싶다. “아빠, 이제 다시 요리도 해 보며 열심히 사세요.” 라는 뜻으로 이 레시피를 보내며 격려했으니 말이다.

 

사고 후 여러 달이 지나니 몸이 망가진 슬픔보다는 알 수 없는 기쁨이 솟구친 게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다. 그게 성령의 도우심이거니 여겼는데 딸의 메모를 보니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가족의 사랑과 고마운 분들의 기도에도 힘입어 기쁜 마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냈거니 생각한다.

 

사실은 링귀니(가느다란 이탈리아식 국수)에 조갯살을 넣은 요리는 내가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요리 중 하나이다. 딸들이 대학생일 때는 서툰 솜씨로 만들어 식탁에 올리고는 식당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내가 직접 만든 게 더 맛있다고 우리 가족에게 자랑하곤 한다. 언젠가 큰딸과 작은딸 식구가 모두 모이면 내가 직접 삶고, 자르고, 섞고, 볶고, 양념 뿌린 맛있는 링귀니를 함께 나누어야 하겠다. 깡통에 든 것 말고 싱싱한 조갯살을 준비해서.

 

(2016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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