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생명이 있는 한 희망 역시 존재한다

삼척감자 2024. 9. 30. 11:09

올해 6월로 교통사고를 당한 지 만 10년이 된다.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그것도 부활이라고 혼자 우기며 10주년 기념을 핑계 삼아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는데, 내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함께 크루즈 여행을 가지 않겠느냐고 제의한 가족이 있었다. 다 짜놓은 계획에 끼어들기만 하면 되니 골치 썩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생각했던 대로, 여행하면서 그분들이 이끄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니 떠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편하기 짝이 없었다.

 

사고 직후 입원할 때부터 퇴원할 때까지 거의 매주 문병하러 왔던 고마운 분들과 함께 부활 10주년 여행을 떠나게 되니 이보다 뜻깊은 일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여행하는 내내 마음속 깊이 그분들의 따뜻한 배려에 감사드렸다.

 

여행 중에 시간 나는 대로 볼 영화를 열 개 가까이 USB에 담아 갔다. 비행기 안이나 배 안에서 틈나는 대로 아이패드로 볼 생각이었다.  미국 코미디, 로맨스, 드라마 그리고 한국 영화 국제시장을 준비했으니 시간이 남아 돌 일은 없을 것이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아내가 국제시장을 보겠다고 해서 아이패드가 내 차지가 된 건 승선하고 나서부터였다. 밤늦게 침대에 누워서 여러 영화 중에서 별 생각 없이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의 전기영화 ‘The Theory of Everything.’을 골랐다. 그가 평생 루게릭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여서가 아니고 얼마 전에 누가 그 영화가 좋더라고 한 말이 얼핏 생각나서였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보다가 바하마의 산호초 섬인 코코 케이 해변에서 일행이 해수욕을 즐기는 동안에 나 혼자 해변용 긴 의자에 누워서 영화를 보는데 다음 장면이 나왔다. 

 

스티븐 호킹이 폐렴에 걸려서 생명이 위태롭자 의사가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기관절개술을 권한다, 이 장면에서 의사와 스티븐의 아내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기관절개술을 할 수밖엔 없어요기관지에 구멍을 내서 목구멍을 우회하는 방법인데 그 경우엔 다시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여러 말 할 거 없어요. 그 사람은 무조건 살아야 합니다.

이어서 다음 장면에서 의사가 스티븐의 목 중앙에 구멍을 낼 위치로 십자 표시를 한다.

 

그 장면에서 내가 교통사고 후 스티븐이 받았던 그 기관절개술이란 걸 받고 여섯 달 동안 말 못하고 음식을 전혀 삼킬 수 없었을 때의 아픔이 되살아 나서 눈물이 났다. 말을 못 하니 혼자 속으로 삭여야 할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느낀 외로움과 배에 구멍을 뚫고 연결한 급식관으로 겨우 죽지 않을 정도의 영양 공급을 받아 연명하며 늘 배고프고 목말라서 느낀 서러움이 한꺼번에 되살아 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배와 목에 뚫었던 구멍이 남긴 흉터를 볼 때마다 언짢지만, 나의 생명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흉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스티븐 호킹은 그 수술 때문에 영원히 목소리를 잃었지만, 나는 성대를 복원하는 수술을 통해 다행히 목소리를 되찾고 음식을 입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말하는 게 힘들고 내 애창곡인 “삼포 가는 길”과 “대전 부르스”를 부를 수 없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게 뭐 대순가. 먹고, 마시고 말할 수 있는 행복, 그게 어딘데.     

 

그 다음 날 새벽에 선실에서 영화를 보는데, 점점 스티븐과 부인의 관계가 악화하는 줄거리가 펼쳐졌다. 부인은 다른 남자와 로맨틱한 관계를 유지하고, 스티븐은 자신을 정성껏 돌보는 간호사에게 마음이 끌린다. 결혼한 지 30년이 거의 다 된, 두 사람 모두 쉰 살 정도 된 어느 날 스티븐이 부인과 상의 없이 간호사와 함께 미국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기로 했다고 알리자 부부간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간다.   

 

     부인 : 도대체 몇 해나 이렇게 지냈지?

     스티븐 : 사람들은 2년밖에 못 살 거라 했지?

     부인 : 그러고 보니 당신 참 오래 살았네.

 

이 장면을 보며 나도 참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있을 때는 밤마다 오늘 밤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아침마다 오늘 하루 더 살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는데 그 하루하루가 쌓여서 10년이 되었다. 퇴원 후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열심히 내 삶의 기록을 남기자. 열심히 여행하자. 뭐든 지금 당장 하자(Do It Now.)고 다짐했던 게 10년 전 일이다. 나 스스로 한 약속을 그동안 충실히 지켰는지 모르겠지만, 아내에게 그러고 보니 당신 (빈둥거리며) 참 오래 살았네.”라는 빈정거림은 듣지 않으니 다행이다.

 

영화의 거의 끝 부분에서다. 스티븐이 미국 어느 대학에서의 강연에서 어느 학생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만한 특별한 철학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제각기 다릅니다. 각자의 삶이 제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누구에게나 이룩해 내고 성공할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 역시 존재하니까요. 제가 보여 주었잖아요.

 

근육이 약해지고 마비된다는 루 게릭 병으로 평생 끔찍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우주 만물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통합 방정식을 끈질기게 찾고자 했던 그였기에 생명이 있는 한 희망 역시 존재한다.’는 그의 말이 큰 감동을 준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찾으려 했던가? 스티븐 호킹의 삶과 나의 삶을 감히 비교해 보면, 나는 한 일 없이 오래 살았다. 그는 1년을 10년처럼 살았고, 나는 10년을 1년처럼 헛되이 보낸 건 아닌지 모르겠다. 

 

(2015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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