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니 새벽 두 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잠들기 전에 인터넷 신문에서 본 유명한 야구 해설가였던 고등학교 동창생의 자살 속보가 떠올랐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자살을 택했겠나? 몇 년 전에 죽을 고비도 어렵게 넘겼다던데 이처럼 허망하게 가다니.
그리고 최근에 검진을 통해 몸에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교우 두 분의 얼굴도 떠올랐다. 재검진, 수술, 치료 등의 힘든 과정을 거칠 그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오랫동안 환자 노릇을 해 본 나는 그게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과정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두 달이 지나 의식을 찾고 보니 병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느님을 원망한 이가 나뿐이었을까? 밤에 병실에 혼자 있을 때는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사고를 당해야 했느냐?”고 주님을 수없이 원망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나를 사고 나기 이전으로 되돌려 달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성대가 망가져서 목소리를 잃고 물 한 모금 삼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절망했다. 다시 먹고 마시고 말할 수 있게 될지, 그게 언제가 될지 확실하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는 죽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높은 건물 옥상에서 아래를 내래다 보며 뛰어내릴까 말까 망설이는 내 모습을 보았다. 환시였다. 뛰어내리려는 유혹에 빠지려는 순간에 정신이 돌아왔다. 병상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는 중환자가 일을 저지를 수는 없었지만, 죽으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혹은 끈질겼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중환자가 잠을 이루지 못하니 심상치 않다고 여겼던지 심리상담전문가가 나를 찾았다. 말 못하는 나와 입술 움직임을 보며 얘기를 나누다가 이해할 수 없으면 공책과 펜을 내밀며 적으라고 했다. 어느 순간 불쑥 그녀가 물었다.
“혹시 자살을 생각하고 있나요?”
“정말 죽고 싶어요.”
그리고 두어 마디 더 나누고 나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중얼거리며 그녀는 일어섰다. 그리고 며칠 동안 주사로 수면제를 놓으며 강제로 재우려 했지만, 수면제도 잘 듣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최악의 상태로 떨어지니 문병 와서 병실에 오래 머무르는 분들이 참 미웠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받아들이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로. 사고 전에 열 번도 더 읽은 욥기의 말씀이 떠오른 건 큰 은총이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욥 2,10) “그래, 좋은 것도 많이 받았는데, 나쁜 것도 받아들이자.” 그리고 다시는 주님을 원망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욥 2,10)는 말씀을 되새기며, ‘앞으로는 많이 웃고 다시 살아난 걸 기뻐하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마음먹자 문병 오는 분들이 반가워졌다.
가끔 웅얼웅얼, 웅성웅성, 와글와글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환청으로 고생해왔기에 몸이 허약해지면 들리던 환청이거니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신경을 거슬리지 않고 마음이 편안하게 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그분들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아무튼,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분들이 많다는 얘기는 큰 힘을 주었다. “꼭 살아야지, 건강을 되찾아야지.”라고 다짐하며 더 많은 분들의 기도를 바라게 되었다.
기력이 없어서 기도를 바칠 수가 없었기에 머릿속으로 십자가의 길을 그려 보았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다른 이들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때로는 나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성모님을 직접 뵙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감히 예수님을 뵙기를 바랄 수 없었지만, 성모님은 마음 편히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며칠 후 어느 날 새벽에 병상 발치에 안드레아 보첼리를 많이 닮은, 머리칼이 덥수룩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왠지 슬퍼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남자의 실루엣은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았는데 그의 표정이 밝아지며, 내 기력도 점차 회복되어갔다. ‘성모님은 안 찾아오시고 웬 엉뚱한 남자가…’라고 어이없어했지만, 아마 그는 내 수호천사였나 보다.
이전에도 도막도막 쓴 글을 다시 이렇게 모아보는 건 내 주위의 편찮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용기를 얻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다. 환자의 체험이라는 게 다 비슷하겠지만, 그래도 신앙을 가진 이들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힘들어도 주님이 주신 걸 받아들이고, 열심히 주님을 찾고, 다른 이들의 기도를 청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다가 병에서 치유되어 히즈키야 왕처럼 “보소서, 저의 쓰디쓴 쓰라림은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제 목숨을 지켜 주셨습니다. (이사 38,17)” 라고 주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2016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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