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아내의 독일 여행 중에

삼척감자 2025. 2. 16. 21:34

작년 10월에 아내가 2주간 독일 여행을 떠났었다. 나이 들어가며 차츰 건강이 나빠진다는 큰 언니를 보러 간 여행이었는데, 텍사스주에 사는 셋째 언니도  합류하여  세 자매 상봉 모임을 가진 것이었다.

 

2주간이라는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운전을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집에 갇혀 지내야 하는 내가 제대로 먹고 사는지 걱정스러워서 몇 분이 연락을 해주었다. 사실은 아내가 떠나기 전에 냉장고가 넘치도록 음식을 장만해 두었었기에 끼니때마다 조리된 채 냉동실에 보관된 음식을 꺼내서 덥히기만 하면 되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운전기사가 없다는 핑계로 미사 참례도 두 번이나 빼먹을 수 있는 것도 땡땡이칠 좋은 기회가 되려니 했다.

 

좀 떨어진 곳에 사는 S형님은 내가 마다하는데도 주일에 길을 일부러 돌아 와서 내가 미사 참례할 수 있도록 차편을 제공해서 오랜만에 합법적으로 미사를 빼먹을 수 있는 기쁨을 앗아 갔다. 게다가 맛있는 점심을 두 번이나 사 주시며 넉넉한 양을 시켜서 남은 건 싸 가서 나중에 먹으라고 몇 번이나 권했다. 덕분에 몇 끼가 손쉽게 해결되었다.

 

혼자 있는 기회를 살려서 두어 달 전부터 식사를 함께하기로 한 분들(먼저 다니던 성당의 교우들)을 집에 오라고 해서 근처 식당에서 한 끼 식사를 때웠는데, 일행 중 두 분이 소주와 집에서 담근 술(약술) 10여 병을 갖고 와서 아내가 없는 동안의 무료감을 덜고도 남아서 오랫동안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다. J 형님이 술이 떨어지는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119에 전화하지 말고, 자신에게 직접 연락하라고 했지만, 넉넉한 술 재고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먼저 다니던 성당의 어떤 교우 한 분은 내가 혼자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다음 날 방문해서 점심을 함께했는데, 내가 굶어 죽을까봐 걱정되었다며, 컵라면 등의 비상식량과 화장지 등의 일용품을 잔뜩 갖고 와서, 냉장고에 보관된 식량 먹을 일을 줄여 주었다. 혼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게 생각보다 참 귀찮아서 우선 그가 갖고 온 비상식량부터 처분하니  편하기는 했다. 마음이 따뜻한 그가 운전을 못 하는 내가 혹시 곤경에 처할까 봐 그런 걸 잔뜩 사 온 걸 보고, 온라인으로 뭐든 살 수 있는데도 그렇게 마음 써 준 그가 참 고마웠다.

 

그렇게 여러 끼를 얻어먹었지만, 그래도 마님 올 날은 멀었기에 부지런히 냉장고를 파먹었다. 그런데 혼자 먹자고 얼린 음식을 녹여서 덥히는 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식사 종류에 변화를 주려고 짜장면, 김치볶음밥 그리고 링귀니 등의  별식을 가끔  만들어 먹기도 했지만, 혼자 먹는 음식은 늘 맛이 없고 청승맞은 생각이 들었다.

 

심봉사처럼 주위의 도움으로 여러 끼니를 해결했더니 냉장고에 보관한 음식이 많이 줄지 않아서 집 나간 아내가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온 후에도 며칠 식사로 때울 수 있었다.

 

아비가 혼자 식사를 하는 게 외로울까 봐 큰딸이 다섯 살 난 막내딸의 저녁을 내 식사 시간에 맞춰서 화상통화로 공동 먹방을 하게 해 주었는데, 먹으랴 얘기하랴 바쁘기만 했고, 식탁에 올린 음식이 너무 간단해서 먹방으로는 부끄러운 수준이어서 외손녀에게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큰딸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 당시에 산책 중에 만난 중국인 할머니에게 혼자 지내려니 밤에 잠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했더니 금세 효과가 직방이라는 수면 유도제를 갖다주어서 그날 밤에 열한 시간이나 내리 자고는 불면증이 한결 덜해졌고 지금도 가끔 필요하면 그 약을 먹는다.

 

마음이 따뜻한 분들 덕분에 아내의 여행 중에 잘 지낼 수 있었다. 뒤늦게나마 이 글을 통해 그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2025 2 16)

'가족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아버지는 외계인  (0) 2025.04.01
일흔여섯 번째 생일 아침에  (0) 2025.03.26
결혼 기념일에  (2) 2024.11.19
영문으로 번역한 책을 만들어 보고  (2) 2024.11.11
혼자 식사하기  (4) 2024.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