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일흔여섯 번째 생일 아침에

삼척감자 2025. 3. 26. 16:47

오늘은 미국 뉴저지의 시골에서 한가롭게 살아가는김형기(金炯基)’라는 사람의 생일입니다. 가까이 지내는 이들 중에는 이날을 장난스럽게형탄절(炯誕節)’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제 생일을 그렇게 기억해 주는 사람도 있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일흔여섯이라는 나이는 여든에 바짝 다가갔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의미가 없어서인지 76세는 일반적으로 크게 기념하는 날은 아닙니다. 그러나 4분의 3세기를 살아온 나이로서 제법 오래 살았다.’고 자부할 만하며, 서양에서는 숫자 7은 행운을, 6은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니 조화롭고 안정된 한 해를 보낼 나이라고 풀이해 봅니다. 하지만 애써 의미를 찾아보니, 이번 생일은 양력 생일(3 26)과 음력 생일(2 27)이 같은 날인 특별한 날입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음력으로 생일을 기억하는 다른 자식들과는 달리 제 생일은 양력으로 기억하시며, 매년 이날 저녁이면 어머니가 손수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여러 차례 밀어 얇게 만든 후 칼로 썬 칼국수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제 양력 생일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과 같다는 사실만으로 부모님은 제가 크게 될 놈이라 기대하셨지만, 두 분 모두 그 기대가 이루어지는 걸 보지 못하셨습니다. 저도 이 나이에 쨍하고 해 뜰 날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고 있습니다. 그건 유행가 가사에나 나오는 말이지요. 

 

아버지는 오래전 마흔아홉 살에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몇 년 전 100세를 꽉 채우고 떠나셨습니다. 그래도 제 나이는 해마다 어김없이 한 살씩 더해졌지만, 별로 내세울 만한 성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그동안 얻어먹은 칼국수 값도 제대로 못 하고 살아온 셈이지요. 해마다 생일이 되면, 멸치로 진하게 맛을 낸 육수에 담긴 국수에 애호박을 조금 썰어 넣고 고추장을 풀어 만든 어머니표 소박한 손칼국수의 맛이 입안에 감돕니다.

 

양력 생일과 음력 생일이 같은 날일 확률은 19년에 한 번 정도라고 합니다. 앞으로 19년 후, 운이 좋다면 또 한 번 양력 생일과 음력 생일이 같은 날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제 나이는 95세가 될 겁니다. 살아서 그날을 직접 맞이할 자신은 없습니다. 희수(77), 산수(80), 미수(88), 그리고 졸수(90)를 지나고도 5년을 더 살아야 95세가 될 텐데, 그 까마득해 보이는 고지까지 도달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세월이 흐르며 몸은 이미 좋은 시절이 지났음을 알려주지만, 마음은 여전히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며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 두 사위, 두 외손녀 그리고 두 외손자,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해 준 성당의 교우들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지나온 삶이 결코 쉬운 길만은 아니었지만, 소중한 이들과 함께했기에 오늘의 제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영화빅 피쉬(Big Fish)’에 나오는내 인생 이야기는 결국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모인 것이다.”라는 대사가 생각납니다. 하루하루는 짧고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들이 모여 우리의 과거가 되고, 결국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는 의미이겠지요? 나이 든 사람의 일상은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교훈으로 이 대사를 받아들이며 마음에 새기려 합니다.

 

오늘 아침, 지나온 삶에 감사하고, 다가올 날들을 소중하게 여겨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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