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된 부엌 캐비닛을 교체하면서 가장 신경 쓰인 것은 조리대였다. 나무는 편안한 느낌을 주지만, 금세 얼룩이 배어 지저분해지고, 반대로 화강암이나 대리석 같은 돌판은 청결하게 유지할 수 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주문에서 설치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Home Depot 직원은 돌판 설치를 외주로 맡기지만, 가격도 비교적 합리적이고 2주면 충분하다고 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부엌 수도와 싱크를 쓰지 못하는 불편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공사 후 새롭게 빛날 조리대를 떠올리니, ‘까짓 2주쯤이야’ 하며 덜컥 계약해 버렸다.
하지만 석재 회사와의 첫 만남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곧 치수를 재러 온다던 기술자는 두어 번 재촉한 끝에 열흘이나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치수를 재고 돌아가는 그에게 설치 시기를 묻자 “열흘이면 충분하다”는 답을 들었지만, 그 열흘은 기약 없는 약속에 불과했다. 결국 3주가 더 흘렀다.
이유는 매번 달랐다. 자재가 늦게 도착했다느니, 가공이 끝나지 않았다느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느니…. 기다림은 답답했고, 화장실을 오가며 설거지와 물을 길어 오는 아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다 계약서를 꼼꼼히 다시 읽어보니 그들이 왜 태연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계약 후 4개월 이내에만 설치를 완료하면 정상적인 계약 이행으로 본다는 조항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계약 내용보다 그들의 말만 믿은 내 잘못이기도 했다.
한 달 가까이 지체된 끝에 드디어 설치 날짜가 잡혔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산책을 나섰는데, 마침 이번 부엌 개조를 맡은 빌(Bill)이 퇴근하는 길에 마주쳤다. 나는 반가워하며 돌판 설치 후로 미뤄 두었던 작업에 관해 말을 꺼냈다. “다음 주 수요일에 돌판이 설치되면 싱크와 식기세척기, 정수기와 하수관 연결까지 바로 마무리해 주세요.”
그러자 빌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걸 어쩌죠? 내일부터 아내의 고향인 폴란드에 2주간 휴가를 다녀와야 해서요.”
그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거의 한 달을 기다렸는데, 또다시 2주를 더 버텨야 한다니. 그러나 곱씹어 보면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문제의 뿌리는 석재 회사에 있었지, 빌은 늘 새벽이든 밤이든 필요하면 와서 성실하게 일해 주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남은 16일이 끝없이 길어 보였다. 그러나 하루 이틀씩 잘라 견디다 보니, 어느새 엿새밖에 남지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실감되었다.
나는 성격이 급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미국에서 40여 년을 살다 보니,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조금씩 배웠다고 생각했다. 한국식 ‘빨리빨리’ 문화가 속도를 중시한다면, 미국식 방식은 늦더라도 실수 없이 정확히 해내는 데 무게를 둔다. 나 역시 그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겪으며 깨달았다. 내 안 깊은 곳에는 여전히 ‘빨리빨리 DNA’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만약 한국에서 돌판 하나 설치하는 데 한 달 반씩이나 걸린다면, 그런 업체가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기다림 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삶의 습관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2025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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