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세상은 우리 대문 앞보다 넓다

삼척감자 2025. 10. 14. 06:23

요즘은 물건 하나 사는 일도 참 편하다. 마트에 갈 필요도 없다. 클릭 몇 번이면 다음 날, 아니, 때로는 오전에 주문한 물건이 오후에 도착한다. 이쯤 되면이게 바로 천국이지싶다.

 

배달 차량의 위치는 지도 위에서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도착하면 문 앞에 놓인 상자 사진까지 이메일로 전해온다. 문을 열지 않아도 내 물건이 지금 세상 어디쯤 와 있는지 다 알 수 있는 세상. 편리함과 게으름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시대다.

 

물론 완벽할 수는 없다. 가끔 이웃집과 물건이 엇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쯤은 대수롭지 않다. “이거 당신네 거 같아요.” 하며 웃으며 주고받는다. 불편보다 신뢰가 먼저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메일을 열어보니 내가 주문한 상자가 옆집 잭네 대문 앞에 놓여 있었다. 아내가 서둘러 달려갔지만 이미 상자는 사라진 뒤였다. 순간, 혹시나 하는 의심이 스쳤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연 잭의 아내 록산느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그게 당신네 거였어요?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문 앞에 상자가 있어서, 우리 건 줄 알고 안으로 들였어요. 수취인 이름을 확인하지 않은 제 실수였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새삼 깨달았다.
이웃이 남의 물건을훔쳐보는대신가져다 두는세상에 산다는 걸.

 

그런데 며칠 전, 한국의 한 유튜브 방송을 보다가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한 패널이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배달 물건 도난이 너무 많아요. 한국처럼 안전한 나라는 없어요!” 그 말에는 묘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애국심이라기보다, 조금은국뽕에 가까운 냄새였다. 물론 한국이 안전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미국을도둑이 많은 나라로 만들어야 할까?

 

나는 수십 년을 미국에서 살아오며, 내 문 앞의 상자를 훔쳐간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도둑이 아니라, 오히려당신 물건이 잘못 왔어요.” 하며 문 앞에 조용히 놓고 가는 이웃들만 봤다.

 

체육관에 두고 온 지갑을 몇 시간 뒤 찾아가니 그대로 있던 일,
식품점에서 물건이 가득 든 카트를 두고 와도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일,
옆 동네로 잘못 배달된 상자를 직접 가져다 주는 이웃의 모습….
이런 이야기들은 내가 사는 이곳에서도 흔하다.

 

사람 사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디는 천국, 어디는 지옥으로 쉽게 나눌 수 없다.
그럼에도한국만이 유일하게 도둑 없는 나라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사람, 대문 밖으로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구나.”

 

아마존 박스 하나에도 세상이 들어 있다. 기술의 발전, 인간의 편의, 그리고 서로를 믿는 마음까지. 국뽕의 안경을 벗고 보면,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덜 나쁘다.
그리고 믿음은 여전히, 우리 집 문 앞의 상자 위에 조용히 놓여 있다.

 

(2025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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