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바보’라는 말은 한국에서 흔히 쓰인다. 딸을 유난히 사랑하는 아빠를 부르는 표현인데, 딸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표정이 환해지고, 사진이나 영상을 꺼내 자랑하기 바쁘다. 딸이 무엇을 해도 예뻐 보이고, 딸을 위해서라면 체면쯤은 쉽게 내려놓는다.
사람들은 종종 “딸바보는 많은데 아들바보는 왜 없지?”라고 묻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들바보도 적지 않다. 다만 아들바보는 크게 드러내지 않고, 아들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혼자 흐뭇해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인류의 절반은 여자이고 절반은 남자이니, 딸바보나 아들바보나 비슷하게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딸바보’, ‘아들바보’ 대신 그냥 ‘자식바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
객관적으로 보면 내 아이는 많은 아이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모에게만큼은 그렇지 않다. 그 특별함은 애착과 시간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음을 내어주고, 태어나는 순간 본능적인 보호와 사랑을 경험한다. 여기에 돌봄과 인내가 더해지면 부모의 시선은 어느새 ‘평가’가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이 된다.
아이를 키우는 시간과 희생은 자연스레 “힘들게 키웠으니 더 소중하다”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복권은 쉽게 얻어도 기쁨을 주지만, 아이는 힘들게 키울수록 더 귀해진다. 경제 논리도 이런 사랑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다이아몬드가 귀한 것도 희소해서인데, 하물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아이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쯤에서 생각나는 속담이 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 이 말은 단순한 외모 칭찬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쁘다’는 ‘귀엽다’거나 ‘잘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소중하다’는 의미에 가깝다. 고슴도치든 사람이든 자식은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이다. 이런 마음은 나라나 종(種)을 가리지 않는다. 한국에는 고슴도치 이야기가 있고, 영미권에는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다”는 말이 있다. 터키에서는 거북이가 자기 새끼를 가장 빠르다고 믿고, 그리스에서는 어미 새가 자기 새끼의 울음소리를 음악으로 여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예쁘다는데, 그보다 훨씬 고등 동물인 나에게 딸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이제 40대 중반이 되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외손녀와 외손자들 역시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잘난 아이들이다.
문학에서도 이런 마음은 오래전부터 표현되어 왔다. 아나톨 프랑스는 “부모의 눈에는 자신의 아이가 기적이다”라고 했고, 괴테는 “아이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이라고 적었다.
부모의 눈길은 대상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면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게 한다. 남들에게는 평범할지라도 부모에게는 단 하나뿐인 존재.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한때 누군가의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였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세월이 흐르면 ‘손주바보’로 이어진다. 서양에는 “손주가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자식보다 손주부터 키웠을 것”이라는 농담도 있다. 자식을 향한 이 지독하고도 따뜻한 편애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한때 누군가의 눈에는 세상에서 하나뿐이었다. 성경 이사야서에도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49, 15)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고 보면 고슴도치 속담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말인지도 모른다.
(2026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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