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온통 하얀 정적에 잠긴 날이다. 오늘처럼 폭설이 내려 꼼짝없이 집에 갇히는 날이면, 마음은 평온해 진다. 창밖의 냉기를 피해 따뜻한 음식과 술 한 잔을 떠올리는 시간. "무엇을 해 먹을까" 고민하는 찰나, 식성이 다른 우리 부부의 입맛이 모처럼 한곳에서 만난다. 바로 '단단면'이다.
단단면을 처음 만난 건 이 동네로 이사를 오고 난 직후였다. 집 근처 사천 식당에서 호기심에 주문했던 그 한 그릇이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유심히 살펴보니 그리 거창한 재료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요리 초보인 나도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만만함이 느껴졌달까. 그날 이후 유튜브를 뒤적이며 내 입맛에 맞는 레시피를 정리해 두었고, 이제는 한 달에 한두 번 우리 집 식탁에 오르는 단골 메뉴가 되었다. 식성이 사뭇 다른 강원도 남자의 입맛에도, 또 충청도 여자의 입맛에도 맞는 데다 감칠맛까지 살아 있고 만들기도 쉬운 요리를 찾아낸 것이다.
내가 단단면을 만드는 날이면 주방의 풍경은 사뭇 진지해진다. 나는 수석 주방장이 되어 조리대를 진두지휘하고, 아내는 기꺼이 보조가 되어 냉장고에서 재료를 나르고 청경채를 씻는다. 조리가 끝난 후 건네오는 아내의 아낌없는 찬사는 나를 다시금 주방으로 불러들이는 가장 맛있는 양념이다.
'단단(担担)'이라는 이름에는 어깨에 멘 멜대라는 뜻이 담겨 있다. 국수 이름에 어깨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 음식이 본래 번듯한 식당의 그릇 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사천성 청두의 좁은 골목, 노점상들은 멜대 양끝에 면과 양념, 작은 그릇들을 나눠 싣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발길을 멈춰 세우면 길가에 쪼그려 앉은 이 앞에 뚝딱 국수 한 그릇을 내놓았을 터다. 단단면은 그렇게 길 위를 걷던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국수였다.
그래서일까. 정통 단단면에는 국물이 거의 없다. 무거운 국물을 짊어지고 다니는 수고로움 대신 고추기름과 산초, 땅콩과 다진 고기가 빚어내는 강렬한 풍미면 충분했다. 몇 번의 젓가락질로 비벼내는 그 맛은 사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리듬에 꼭 맞는 에너지였다.
세월이 흘러 단단면은 길을 떠났다. 사천의 골목을 벗어나 바다를 건넜고, 일본의 라멘 문화와 만나 걸쭉한 육수를 품으며 부드러워졌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국물 있는 단단면은 그렇게 타향의 입맛에 맞춰진 진화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릇 속에 국물이 있든 없든, 단단면의 뿌리는 변하지 않는다. 멜대를 메고 골목을 누비던 한 사람의 발걸음과 그 짧은 멈춤이 주던 위로. 단단면은 여전히 그 시절의 속도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았던 한 끼의 기억으로 말이다.
창밖엔 여전히 눈이 내린다. 멜대 대신 앞치마를 두른 초보 요리사의 손끝에서, 오늘 저녁 우리 집 식탁 위로 뜨겁고 진한 사천의 골목이 찾아온다.
(2026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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