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기억이 불러낸 안옹근 이름씨

삼척감자 2026. 3. 13. 20:36

가끔은 기억의 저장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기억이 불쑥 얼굴을 내민다. 마치나 여기 있어하고 손을 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도 깜짝 놀란다. 아직 기억력이 그리 심하게 쇠퇴하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괜히 아내에게 그 사실을 슬쩍 자랑하며 으쓱해지기도 한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식품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차창 밖을 내다 보고 있는데, 갑자기 몇십 년 전 교실의 풍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말본(문법) 선생님이옹근 이름씨(자립 명사)’안옹근 이름씨(의존 명사, 곧 불완전 명사)’를 설명하시던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좀 마른 얼굴에 호리호리한 체구였고, 늘 근엄한 표정을 지으셨다. 학생들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쓰셨다. 수업 시간에 농담 한마디 하지 않으셨으니 교실 분위기는 언제나 딱딱했고, 재미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날따라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떠올랐다.

어라, 안옹근 이름씨가 뭐였더라?”

 

문득 궁금해져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자안옹근 이름씨는 옛 한국어 문법에서 쓰던 말로, 오늘날 문법 용어로 말하면 의존 명사를 가리킨다는 설명이 머릿속에서 스르르 정리되어 떠올랐다. 다른 말에 기대어야만 쓰일 수 있는 명사, 그래서 혼자서는 문장 성분이 되기 어려운 명사라는 것까지 기억이 이어졌다. 그 순간 괜히 내 기억력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자료를 찾아보니, 예전 국어 교과서에는 두 계통의 문법 용어가 함께 쓰였다고 한다. 하나는 최현배 선생이 제창한 순우리말 중심의말본용어였고, 다른 하나는 이희승 선생 계열의문법용어였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처럼문법이라는 체계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자료에 나온 용어들을 비교해 보니, 순우리말 문법 용어들이 유난히 정겹게 느껴졌다.
이름씨(명사), 대이름씨(대명사), 셈씨(수사), 움직씨(동사), 어떻씨(형용사), 어떤씨(관형사), 어찌씨(부사), 느낌씨(감탄사), 토씨(조사).

말맛이 살아 있는 듯해 읽는 것만으로도 묘한 친근감이 들었다.

 

평생 순우리말 사용을 강조했던외솔최현배 선생의 영향 때문인지, 그가 오래 몸담았던 연세대학교에서도 한동안 순우리말을 쓰려는 노력이 이어졌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까지도 캠퍼스 주차장에는주차대신이라는 순우리말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낯설면서도 재미있는 풍경이다.

 

이 글을 안옹근 이름씨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그 예를 몇 가지 들며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

할 것이 많다
갈 수 있다
내가 말한 바
갈 데가 없다
아는 지 오래되었다

이 말들은 혼자서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앞에 동사나 형용사, 또는 관형어가 붙어야 비로소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기억도 어쩌면 이런 안옹근 이름씨와 비슷한지 모른다. 평소에는 조용히 숨어 있다가 어떤 계기 하나에 기대어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026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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