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82

셔츠 아래의 진실, 강론 너머의 복음

언젠가 한 신부님께 조심스러운 건의를 드린 적이 있다. 신부님의 강론이 알차고 훌륭하지만, 조금만 유머를 섞어보시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딱딱하고 긴 말씀보다는 웃음이 섞인 이야기가 신자들의 집중력을 높이고 마음을 더 편안하게 열어줄 것이라는, 나름대로는 ‘선의’가 담긴 조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신부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유머를 넣으면 말이죠, 미사가 끝나고 나갈 때 신자들은 복음은 다 잊어버리고 제가 했던 웃긴 이야기만 기억합니다.” 그 완강한 거절 앞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정말 그럴까? 메시지와 재미는 결코 함께 갈 수 없는 평행선인 걸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뀐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아주 오..

이것저것 2026.02.14

어디, 봄이 오면 보자

Linn Brown의 곡 ‘Winter Is…’는 음악이라기보다 겨울이 건네는 나지막한 독백에 가깝다. 멜로디의 기복도, 화려한 변주도 없이 덤덤하게 반복되는 선율은 우리 곁에 이미 깊숙이 자리 잡은 겨울의 존재를 일깨운다. 노래는 겨울을 미화하거나 극복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겨울은 지금 여기 있다"라고 조용히 읊조릴 뿐이다. 겨울은 숨을 죽이고겨울은 눈빛처럼 희다겨울은 얼음의 시간이고겨울은 밤의 얼굴이다겨울은 색을 잃은 빛겨울은 비워진 풍경겨울은 세월의 흔적겨울은 매서운 손길겨울은 단단한 심장겨울은 뜻밖의 온기겨울은 고요한 아름다움그리고겨울은 이미 여기 와 있다 겨울은 눈빛처럼 희고 밤의 얼굴을 닮았으며, 때로는 매서운 손길로 세월의 흔적을 훑고 지나간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마주하는 이 계절은 ..

이것저것 2026.02.11

꿈길에서 마주친 사람들

세상을 떠난 이가 꿈에 나타날 때가 있다. 그러면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 모습이 쉽게 잊히지 않아 한동안 멍해진다.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왜 아무 말도 없이 다녀갔을까.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그런 질문들이 밀려온다. 꿈속에서 만난 이들은 대개 말이 없다. 하지만 그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마음은 출렁인다. 어쩌면 꿈은 기억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가장 조용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낮 동안 애써 눌러두었던 추억이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숨을 쉬고, 마음은 꿈이라는 무대 위에 그 사람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쉰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수십 년 세월 동안 잊을만하면 꿈에 나타나셨다. 소문난 술꾼이었던 생전의 모습 그대로, 꿈에서도 늘 취해 계셨다. 반면 몇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이것저것 2026.02.10

이별에도 저마다의 언어가 있다

예배당이나 성당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나는 이를 배웅할 때마다, 나는 이별에도 저마다의 언어가 있음을 새삼 실감한다. 오랜 세월 가톨릭의 전례에 익숙해 진 내게, 어쩌다 마주하는 예배당의 장례식은 여전히 조금은 낯선 풍경으로 다가오곤 한다. 성당의 이별은 정해진 길을 걷듯 분명하다. 고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뷰잉(Viewing)'에서 시작해, 제대 앞에 닫힌 관을 두고 올리는 장례 미사, 그리고 장지에서의 하관예절까지. 그중에서도 뷰잉은 신앙의 언어보다 인간의 슬픔이 앞서는 시간이다.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연도)를 바치고 추도사를 읽으며 고인의 삶을 반추하는 동안, 우리는 신앙인 이전에 나약한 인간의 얼굴로 선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속절없이 작아진다는 사실을 굳이 ..

신앙 생활 2026.02.09

마음속에 남겨진 다정한 영토

40여 년 전, 미국 주재원 발령과 함께 시작된 타향살이는 막막함 그 자체였다. 먹고사는 문제는 없었을지언정, 쏟아지는 업무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력은 출구 없는 미로 같았다. 게다가 언어의 장벽까지. 그 거대한 중압감에 짓눌려 나는 늘 숨 가쁜 나날을 보냈다. 아내의 삶 또한 고단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집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힌 채,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이들 사이에서 한 살과 세 살배기 두 딸을 건사하는 일. 산 설고 물 설은 타국 땅에서 아내가 감내했을 고립감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두 해가 흘러 큰아이가 유치원에 갈 무렵, 우리 집 거실 한쪽에 '위니 더 푸'가 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화면 속 노란 곰에게 금세 마음을 빼앗겼다. 그 애니메이션이 바로 ‘곰돌이 푸의 모험(..

가족 이야기 2026.02.08

연어를 갈무리하며

내 고향 삼척에는 시가지를 가로질러 오십천(五十川)이 흐른다. 어린 날의 기억 속 그 강은 산란기를 맞아 연어들이 거슬러 올라올 때면 생동감이 넘쳤다. 그 시절 우리는 연어 배에서 꺼낸 알을 소금에 절여 별미로 즐겼지만, 정작 연어 고기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없다. 훗날 연어의 생태를 알고서야 비로소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악전고투 끝에 상류에 닿은 연어는 온몸이 찢기고 쇠약해진, 그야말로 만신창이의 몸이었다. 생의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부어 대를 이은 그 살에 맛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나이 들어서 머나먼 미국 땅에 살며, 나는 코스트코에서 파는 노르웨이산 양식 연어를 즐겨 찾는다. 선명한 주홍빛 색감에 마음이 먼저 끌리기도 하거니와, 기생충이나 중금속 걱정 없이 안심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

시간여행 2026.02.04

체육관에서 되찾은 것

젊었을 적에는 기억력이 좋고 매사 빈틈 없기로 소문났던 나도, 나이가 드니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자주 저지른다. 평일이면 집과 체육관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 체육관에서 소지품을 잃었다가 되찾은 일이 몇 년 사이 여러 번 있었다. 얘기하기엔 다소 민망하지만,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겸해 이 글을 적어 본다. 그런 일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 체육관. 몸을 단련하러 가는 곳이지만, 돌이켜보면 내 마음이 더 단련된 곳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휴게실에서 아내의 운동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컴퓨터로 이런저런 화면을 넘기다 아내가 오자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지갑을 컴퓨터 옆에 둔 채였다. 성당 교우의 가게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얻어마시고 집에 돌아와서야 지갑이 없다는 걸..

미국 생활 2026.02.03

멈춰 선 아침이 건넨 말

유난히 추운 주일 아침이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하려고 채 가시지 않은 냉기를 뚫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으나, 익숙하게 터져 나와야 할 엔진의 활기찬 진동 대신 '끼릭, 끼릭' 하는 메마른 소리만 돌아왔다. 차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몇 번 더 시동을 걸어보려다 이내 손을 멈췄다. 억지로 깨우려다가는 남은 온기마저 방전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기 때문이다. 서둘러 AAA(미국 자동차협회)에 전화를 걸어 긴급 출동서비스를 요청했다. 휴일 아침이라 혹여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을까 내심 조바심이 났지만, 이내 한 시간 후면 도착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좀 늦어잘 거라는 연락이 두 번이나 더 왔다. 아마 이 매서운 추위 아래, 나처럼 멈춰 서서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이 도처에..

미국 생활 2026.02.02

체육관에서 처음 만난 목사님

가까이 지내던 이웃 동네의 목사님께서 몇 년간의 투병 끝에 오늘 세상을 떠나셨다는 연락을 받고, 가슴 한구석이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7년 전, 뉴저지 중부로 이사 와 처음 다니기 시작한 체육관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운동을 하다 오가며 나눈 평범한 인사가 인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첫 인사 속에서도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어도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고, 목사라는 직분이나 나이를 앞세우기보다는 늘 한 사람의 이웃으로 대해 주는 분이었다. 나보다 네 살 위였던 그분은 생전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 언제나 대하기가 편안했다. 나는 가톨릭 신자였고 그는 개신교 목사였지만, 종파의 차이가 우리 사이에 문제가..

신앙 생활 2026.02.01

눈은 공평하게 내리지만, 노인에게는 무게가 다르다

폭설이 내린 지 엿새가 지난 오늘 아침,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웹사이트를 둘러보았다. 게시판에는 여전히 눈을 치우지 못해 고생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글들이 가득했다. 제설 업체에 연락해도 함흥차사라는 사연부터, 약속 시간에서 몇 시간 지나 연락하며 애초에 합의된 요금에서 세 배나 더 요구했다는 하소연까지 분통 터지는 소식들이 이어졌다. 특히 병원 방문이나 식료품 구입조차 어려워 발이 묶인 분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웃도 업체도 모두 ‘제 코가 석 자’이거나 일감이 밀려서 도움의 손길이 닿기엔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겨울이 오면 눈은 더 이상 아름다운 설경을 꾸미는 선물이 아니다. 도리어 근심과 걱정을 몰고 오는 불청객에 가깝다. 두 딸이 어렸을 적, 아이들은 창밖을 보며 설렘에 눈을 반짝이곤 ..

미국 생활 2026.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