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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신가요

페이스북을 열었다가 ‘과거의 오늘’이라는 창을 무심코 눌렀다.7년 전의 내가 불쑥 현재로 걸어 나왔다. 짧은 글 하나, 그리고 그 아래 달린 열세 개의 댓글.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가 문득 손이 멈췄다. 그중 세 분이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60대에 먼저 가신 분, 70대를 살다 떠난 두 분. 그때는 그저 이름과 문장으로 남아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기억 속의 목소리가 되었다. 댓글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사라졌다. 화면 속에서는 여전히 웃고, 공감하고, 말을 건네는데, 그 말에 다시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현실보다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요즘 들어 부고 소식이 잦아졌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던 사람들이 하나둘 길을 달리..

신앙 공동체 22:11:18

세월이 건네온 두 번째 합격

30년 전 어느 겨울 오후, 가게에서 일하다 말고 집으로 달려가 우편함을 열었을 때, 두툼한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발신인은 큰딸이 지원했던 대학교였다. 그 순간, 손끝이 먼저 알아챘다. 이것이 기다리던 소식이라는 것을. 봉투를 뜯기도 전에 가슴이 먼저 뛰었다. ‘합격통지서’임을 확인하는 순간, 세상이 환하게 열리는 듯했다. 부모의 재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설명서가 있었다는 사실도 서류뭉치를 몇 번이나 다시 들여다본 뒤에야 알았다. 그만큼 나는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내 나이는 마흔일곱이었다. 지금처럼 손안의 전화기로 곧바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 기쁨을 단 한순간도 늦추고 싶지 않아 나는 곧장 딸이 다니던 학교로 달려갔다. 안내실에..

가족 이야기 2026.03.30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 내용 요약

인류는 오랜 세월 굶주림과 전쟁이라는 생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마침내 그 문턱을 넘어선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를 '호모 데우스'라 칭하며 불멸과 행복, 그리고 신적 능력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신의 권능을 흉내 내는 이 화려한 진화의 이면에는, 인간의 존재 가치가 데이터와 알고리즘 속에 파묻혀버리는 서늘한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먹고 누구를 사랑할지조차 AI의 추천에 의존한다. 우리의 감정과 선택이 단지 계산된 데이터의 흐름으로 환원될 때, 인간 중심주의라는 근대적 가치는 뿌리째 흔들린다. 더욱이 AI가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며 등장할 '무용(無用) 계급'에 대한 공포는 "나는 왜 필요한 존재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생산성이 ..

이것저것 2026.03.28

기쁨으로 맞이하는 나이, 희수(喜壽)

작년 오늘, 한국식 셈법으로는 이미 일흔일곱, 희수를 맞이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자란 딸들에게는 만(滿) 나이가 기억하기에 더 수월할 터였다. 그래서 만으로 일흔일곱이 되는 오늘, 나의 희수를 자축하기로 했다. 요란한 잔치를 벌이려는 마음은 없다. 다만 딸들에게 이 나이에 담긴 뜻을 전해주고 싶어 책상 앞에 앉아 자료들을 찾아 보았다. 예로부터 이 나이를 넘기는 일은 드물다고 고희라 불리는 70세 이후의 몇몇 나이에 우리 조상들은 특별한 이름을 붙여 축하했다. 여든의 산수(傘壽), 여든여덟의 미수(米壽), 아흔아홉의 백수(白壽)가 그렇다. 그중에서도 일흔일곱, 희수(喜壽)의 '희(喜)'자를 들여다본다. 본래 이 글자는 고대 문자에서 북을 뜻하는 '주(壴)'와 입을 뜻하는 '구(口)'가 합쳐진 모양새..

가족 이야기 2026.03.26

죽음은 정말 고통스러운 것일까?

Galdencia GlennFemale Doctor (2012–present) 나는 이 일을 선택했을 때 예상보다 훨씬 자주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죽음이 폭력이나 혼란 없이 자연스럽게 찾아올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덜 두렵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죽음은 실제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크게 두려워하는 대상에 가깝다. 임종이 가까워지면 몸은 여러 신호를 보낸다.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통증을 완화하고, 의식은 점차 흐려지며 인식은 단순해진다. 산소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뇌는 이를 극심한 고통으로 느끼지 않고, 사람은 갑자기 무너지기보다 서서히 떠다니듯 이행한다. 호흡은 느려지고 불규칙해지지만, 당사자는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과정은 완화의료를 ..

교통사고 이후 2026.03.24

바람에 흔들리는 마음

요즘 세상은 온통 ‘바람’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TV를 켜도, 스마트폰을 열어도 누군가의 은밀한 사생활이 자극적인 활자와 영상으로 쏟아진다. 그 속의 인물들은 성별도, 나이도, 만남의 방식도 제각각이다. 반복되는 소음 속에 있다 보면, 인간이란 이토록 쉽게 마음을 주고 또 쉽게 등을 돌리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차분히 들여다보면 세상이 갑자기 타락한 것은 아니다. 통계자료는 말한다. 과거보다 불륜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도, 우리나라가 유독 도덕적으로 해이한 것도 아니라고. 달라진 것은 ‘드러나는 방식’이다. 예전 같으면 담장 안쪽에 묻혔을 일들이 빛의 속도로 공유되는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실제보다 더 많은 바람을 목격하고 있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무와 남..

이것저것 2026.03.23

최깐깐이 선생님의 가르침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언론에 소개되기 시작했을 때, 문득 중학교 시절 국사 선생님이 떠올랐다. 키가 크고 얼굴 전체에 얽은 자국이 남아 있어 한눈에도 잊기 어려운 인상이었지만, 학생들 가운데 누구도 그분을 ‘곰보’라 부르지 않았다. 대신 원리와 원칙을 유난히 중시하시던 성격을 빗대어 ‘최깐깐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조롱이 아니라, 어쩌면 존경에 가까운 별명이었다. 우리는 선생님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존경하고 있었기에, 외모를 빌미로 몰래 조롱하는 일은 없었다. 수업 시간에 태도가 좋지 않은 학생이 있으면 선생님은 그를 조용히 일으켜 세우고 명찰을 확인하셨다. 그리고는 “최 아무개, 너 어느 최 씨냐?” 하고 물으셨다. 이어 그 성씨의 유래와 조상의 행적을 들려주시며, 그렇게 훌륭한 뿌리를 가진..

시간여행 2026.03.18

영화를 보고 왔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고 왔다.그것도 ‘왕과 사는 남자’라는 한국 영화를 보러.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30분쯤 떨어진 New Brunswick까지 다녀왔다.노인 할인으로 산 입장권 값이 10달러도 채 되지 않았으니 참 싼 가격이다.사실 이미 유튜브를 통해 영화에 대해 알 것은 거의 다 알고 간 셈이다.배우들이 열연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줄거리도 훤히 알고 있었다.최근 미국과 캐나다 등 해외에서 상영된 뒤 유튜브에는 이런저런 썸네일이 많이 떠 있었다.“폭풍 오열, 미친 감동.”“외국인들도 이 영화에 푹 빠졌다.”이런 말들이 눈길을 끌었다.좌석이 백 석 남짓한 영화관에 모인 관객은 마흔 명이 채 되지 않았다.외국인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폭풍 오열’하는 사람도 물론 없었다.전체적인 분위기는 대체로 차분..

미국 생활 2026.03.16

기억이 불러낸 안옹근 이름씨

가끔은 기억의 저장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기억이 불쑥 얼굴을 내민다. 마치 “나 여기 있어” 하고 손을 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도 깜짝 놀란다. 아직 기억력이 그리 심하게 쇠퇴하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괜히 아내에게 그 사실을 슬쩍 자랑하며 으쓱해지기도 한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식품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차창 밖을 내다 보고 있는데, 갑자기 몇십 년 전 교실의 풍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말본(문법) 선생님이 ‘옹근 이름씨(자립 명사)’와 ‘안옹근 이름씨(의존 명사, 곧 불완전 명사)’를 설명하시던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좀 마른 얼굴에 호리호리한 체구였고, 늘 근엄한 표정을 지으셨다. 학생들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쓰셨다. 수업 시간에 ..

시간여행 2026.03.13

개꿈도 가끔은 쓸모가 있다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꿈은 금세 잊혀 버리니, 따지고 보면 거의 다 개꿈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꿈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꿈이 미래를 정확히 예지한다는 증거는 없다는 사실을 나 역시 알고 있다. 물론 어떤 꿈이 우연히 미래의 사건과 맞아떨어질 때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의 일치일 뿐 꿈이 미래를 알려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가끔은 유난히 선명하고 의미가 있을 것 같은 꿈을 꾸면 인터넷에서 꿈 해몽을 찾아본다. 그리고 복권을 살지 말지를 잠시 따져 본다. 드물게 꿈에서 귀인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꼭 복권을 사곤 했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맞아 본 적이 없으니, 그 꿈들 역시 결국은 개꿈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꿈..

가족 이야기 202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