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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대하여

오래전, 맹인 가수 이용복이 불러 인기를 얻었던 번안가요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원제: 1943년 3월 4일)가 문득 떠올랐다. 구글에서 찾아보니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바람이 휘몰던 어느 날 밤 그 어느 날 밤에 /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 /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는 구절은 잊히지 않는다. 그 노래가 주는 여운이 꽤 오래 가는 것 같다. 얼마 전, 중고책을 거래하는 온라인 서점을 통해 『The Greatest Gift』라는 소설을 구해 읽다가, 내친김에 한국어로 번역해 보았다. 그러다 느닷없이 그 노래가 떠오른 것은, 소설이나 그 노래 가사 모두 '내가 이 세상에 ..

이것저것 05:44:07

오랜만에 친구의 소식을 듣고

아주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인 J의 소식을 들었다. 본인에게서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그의 아내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9년 전, 뇌일혈로 건강에 이상이 생긴 이후로 계속 투병해왔지만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고, 최근에는 친구들에 대한 기억조차 거의 잊은 상태라며, 친구들이 함께 운영하던 단체 친목방에서 부득이하게 탈퇴하겠다는 소식이었다.고등학교 1학년 때 그는 내 바로 뒤, 한 칸 건너 자리에 앉아 있어 1년 내내 가까이서 지냈다. 잘생긴 얼굴에 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한 표정이어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었다. 영어 시간에 교과서를 읽으면, 하와이에서 교환교수로 다녀온 경험이 있는 원어민 발음에 익숙한 선생님도 그의 발음을 칭찬할 정도였다. 억양이 정확..

시간여행 2025.04.25

필립 반 도렌 스턴의 가장 위대한 선물

중고 책 온 라인 거래회사인 Thrift Books을 통해서 필립 반 도렌 스턴(Philip Van Doren Stern)이 쓴 ‘가장 위대한 선물(The Greatest Gift)이라는 책을 한 권 샀다. 유명한 크리스마스 영화 “It’s a Wonderful Life”의 원전인데, 읽어보니 영화에 비해 소설은 내용이 단순하고 밋밋하여 재미가 덜하다. 그래도 소설과 영화를 자세히 비교해 보고 싶어서 별로 길지 않은 전문을 한국어로 번역해 보았다. 필립 반 도렌 스턴의 가장 위대한 선물(소개) “가장 위대한 선물”을 출판해 줄 회사를 찾지 못한 필립 반 도렌 스턴은 1943년, 이 이야기를 200부 인쇄하여 크리스마스 카드로 사용했다. 이 소박한 시작에서 고전이 탄생했다. 반 도렌 스턴의 이야기는 “평생..

이것저것 2025.04.22

조앤 할머니

우리 이웃에 살던 조앤 할머니는 올해로 여든이셨다. 얼굴만 봐도 까다롭게 생긴 데다, 성격도 급하고 성마른 편이었다. 우리가 몇 년 전 이사 왔을 때부터 사소한 일로 텃세를 부리려 들었다. 쓰레기 처리나 화단에 꽃 심는 문제 같은 사소한 일에 잔소리를 하거나, 규정을 어겼다며 관리인에게 일러바치기도 했다. 그런 모습에 기분이 상할 때도 있었지만, 바싹 마른 몸에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로 봐선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고, 굳이 맞대응하기보다는 그냥 웃어넘기며 지내곤 했다. 다행히도 할머니는 이웃과 거의 교류가 없었고, 식료품을 사러 나오는 정도 외엔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어쩌다 마주쳐도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고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주차된 차만 그대로 있고, 할머니의 모습이 전혀 보이..

미국 생활 2025.04.17

러시아인들의 이름은 왜 이렇게 복잡할까?

이베이에서 중고로 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시작한 지 꽤 됐는데, 이상하게도 책갈피는 늘 그 자리에 있다. 세 권으로 된 책 전체 분량이 1,500쪽쯤 되니 만만한 분량은 아닌데, 책갈피가 좀처럼 앞으로 가지 않으니 이걸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나마 제1권 절반쯤 읽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런데도 아직도 주요 등장인물 이름이 헷갈리니, 이름 외우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치는 느낌이다.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은 처음부터 구조가 복잡하다. 우리처럼 이름이 두세 글자로 끝나는 게 아니다. 보통 이름 + 부칭 + 성,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여기서 ‘부칭’이란, 누구의 아들이나 딸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 이름이 이반이면, 아들은 ‘이바노비치’, 딸은 ‘이바..

이것저것 2025.04.10

할아버지는 외계인

LA에 사는 외손자 생일 축하 카드를 보냈다. 썩 잘 그린 카드라서 놀랐고, 그런 멋진 카드를 만들게 한 작은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큰딸네 아들과 두 딸은 영상 통화로 “Happy Birthday, 할아버지!”라고 축하 인사를 한 다음에 한두 마디 안부 인사를 나누고는 바로 화면에서 사라지는 게 강제 동원된 기색이 역력했다. 어릴 적에는 어쩌다 방문하면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하던 외손녀와 외손자는 대개 여섯 살 전후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외계인 보듯 하기 시작했다. 두 딸의 가족 모두 우리와 멀리 떨어져 살아서 몇 년에 한 번 정도 보게 되고 보이지 않는 언어 장벽도 있으니, 아이들이 커가면서 그렇게 변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까이 지내는 분들과의 정기 모임이 이번에는 마침 내 생일..

가족 이야기 2025.04.01

까칠녀 얘기

올해 나이 80이 된다는 이웃 영감이 나와 산책길에서 마주치면 그가 꺼내는 대화는 대개 정해져 있다.첫째는 날씨 얘기. 둘째는 허리가 아파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얘기. 이 얘기를 할 때는 꼭 얼굴을 찌푸린다. 셋째는 근처에 사는 메리라는 좀 젊은 할머니 흉을 보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의 호칭은 까칠녀(사실은 ㅁㅊㄴ이라고 부르는데 조금 순화해서)이다. 오늘 아침에는 까칠녀 얘기를 먼저 꺼내었는데, 무슨 국가 기밀 얘기하듯이 목소리를 낮추고, 좌우를 둘러보며 얘기를 시작했는데, 내용이라야 늘 듣던 거라서 별 거 없다.“조금 전에 까칠녀가 산책하는 걸 보았어. 자네 그녀를 보면 주의하게. 눈 마주치지 말고. 말 걸지 말게나. 알았지?”그 영감과 까칠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

미국 생활 2025.03.30

일흔여섯 번째 생일 아침에

오늘은 미국 뉴저지의 시골에서 한가롭게 살아가는 ‘김형기(金炯基)’라는 사람의 생일입니다. 가까이 지내는 이들 중에는 이날을 장난스럽게 ‘형탄절(炯誕節)’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제 생일을 그렇게 기억해 주는 사람도 있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일흔여섯이라는 나이는 여든에 바짝 다가갔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의미가 없어서인지 76세는 일반적으로 크게 기념하는 날은 아닙니다. 그러나 4분의 3세기를 살아온 나이로서 ‘제법 오래 살았다.’고 자부할 만하며, 서양에서는 숫자 7은 행운을, 6은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니 조화롭고 안정된 한 해를 보낼 나이라고 풀이해 봅니다. 하지만 애써 의미를 찾아보니, 이번 생일은 양력 생일(3월 26일)과 음력 생일(2월 27일)이 같은 날인 특별한 날입니다...

가족 이야기 2025.03.26

악어와 악어새, 그리고 치과의사와 환자

강가에 사는 거대한 악어는 종종 입을 벌린 채 휴식을 취하곤 한다. 그러면 어디선가 작은 악어새가 날아와 악어의 이빨 사이를 부지런히 쪼아댄다. 악어새는 악어의 치아에 낀 찌꺼기를 먹으며 배를 채우고, 악어는 덕분에 치아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 이 둘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치과의사와 환자도 마찬가지다. 환자는 치아 건강을 위해 정기적으로 치과를 방문하고, 치과의사는 환자의 치아를 깨끗이 관리해 준다. 치과의사는 환자의 구강 건강을 돌보며 생계를 유지하고, 환자는 건강한 치아로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악어와 악어새가 자연 속에서 공생하듯, 치과의사와 환자도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살아간다. 정기적인 검진과 치아 클리닝을 통해 환자는 더 오랫동안 건강한 치아를 유지할 수 있고, 치과의사는..

이것저것 2025.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