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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외계인

LA에 사는 외손자 생일 축하 카드를 보냈다. 썩 잘 그린 카드라서 놀랐고, 그런 멋진 카드를 만들게 한 작은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큰딸네 아들과 두 딸은 영상 통화로 “Happy Birthday, 할아버지!”라고 축하 인사를 한 다음에 한두 마디 안부 인사를 나누고는 바로 화면에서 사라지는 게 강제 동원된 기색이 역력했다. 어릴 적에는 어쩌다 방문하면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하던 외손녀와 외손자는 대개 여섯 살 전후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외계인 보듯 하기 시작했다. 두 딸의 가족 모두 우리와 멀리 떨어져 살아서 몇 년에 한 번 정도 보게 되고 보이지 않는 언어 장벽도 있으니, 아이들이 커가면서 그렇게 변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까이 지내는 분들과의 정기 모임이 이번에는 마침 내 생일..

가족 이야기 2025.04.01

까칠녀 얘기

올해 나이 80이 된다는 이웃 영감이 나와 산책길에서 마주치면 그가 꺼내는 대화는 대개 정해져 있다.첫째는 날씨 얘기. 둘째는 허리가 아파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얘기. 이 얘기를 할 때는 꼭 얼굴을 찌푸린다. 셋째는 근처에 사는 메리라는 좀 젊은 할머니 흉을 보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의 호칭은 까칠녀(사실은 ㅁㅊㄴ이라고 부르는데 조금 순화해서)이다. 오늘 아침에는 까칠녀 얘기를 먼저 꺼내었는데, 무슨 국가 기밀 얘기하듯이 목소리를 낮추고, 좌우를 둘러보며 얘기를 시작했는데, 내용이라야 늘 듣던 거라서 별 거 없다.“조금 전에 까칠녀가 산책하는 걸 보았어. 자네 그녀를 보면 주의하게. 눈 마주치지 말고. 말 걸지 말게나. 알았지?”그 영감과 까칠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

미국 생활 2025.03.30

일흔여섯 번째 생일 아침에

오늘은 미국 뉴저지의 시골에서 한가롭게 살아가는 ‘김형기(金炯基)’라는 사람의 생일입니다. 가까이 지내는 이들 중에는 이날을 장난스럽게 ‘형탄절(炯誕節)’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제 생일을 그렇게 기억해 주는 사람도 있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일흔여섯이라는 나이는 여든에 바짝 다가갔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의미가 없어서인지 76세는 일반적으로 크게 기념하는 날은 아닙니다. 그러나 4분의 3세기를 살아온 나이로서 ‘제법 오래 살았다.’고 자부할 만하며, 서양에서는 숫자 7은 행운을, 6은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니 조화롭고 안정된 한 해를 보낼 나이라고 풀이해 봅니다. 하지만 애써 의미를 찾아보니, 이번 생일은 양력 생일(3월 26일)과 음력 생일(2월 27일)이 같은 날인 특별한 날입니다...

가족 이야기 2025.03.26

악어와 악어새, 그리고 치과의사와 환자

강가에 사는 거대한 악어는 종종 입을 벌린 채 휴식을 취하곤 한다. 그러면 어디선가 작은 악어새가 날아와 악어의 이빨 사이를 부지런히 쪼아댄다. 악어새는 악어의 치아에 낀 찌꺼기를 먹으며 배를 채우고, 악어는 덕분에 치아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 이 둘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치과의사와 환자도 마찬가지다. 환자는 치아 건강을 위해 정기적으로 치과를 방문하고, 치과의사는 환자의 치아를 깨끗이 관리해 준다. 치과의사는 환자의 구강 건강을 돌보며 생계를 유지하고, 환자는 건강한 치아로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악어와 악어새가 자연 속에서 공생하듯, 치과의사와 환자도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살아간다. 정기적인 검진과 치아 클리닝을 통해 환자는 더 오랫동안 건강한 치아를 유지할 수 있고, 치과의사는..

이것저것 2025.03.21

컴맹과 문맹

가끔 나이 드신 분들에게서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문제가 있다며 도움을 요청받곤 한다. 때로는 직접 댁을 방문해 문제를 해결해 드리기도 한다. 대부분 간단한 문제들이지만, 어르신들은 그러한 작은 문제에도 답답해하며, 내가 손쉽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초보 수준을 갓 벗어난 나를 전문가로까지 추켜세우시니 민망할 때가 많다. ‘컴맹’이라는 단어는 ‘문맹’에서 유래한 조어로, 컴퓨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초기에는 단순히 컴퓨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했지만, 오늘날에는 기본적인 사용은 가능하더라도 컴퓨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노인들에게 새로운 기술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므로, 이를 거부하..

이것저것 2025.03.20

WC가 워싱턴대학교라고요?

어릴 적, 그러니까 1950년~60년 대에 강원도 시골에서는 화장실을 변소, 뒷간, 작은집 정낭, 통시 등으로 불렀다. 이런 단어만 들어도 작은 직사각형 구멍 아래로 쌓인 대변 덩이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던 재래식 시골 변소가 연상된다. 대개 집에서 좀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데다가 대개는 전등마저 없어서 밤에는 혼자 볼일 보러 가기가 무서웠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바닷가 마을인 M 읍의 중학교에 전학하니 읍내 여러 업소의 변소에서 가끔 부서질 것만 같은 문짝에 쓰인 W. C. 라는 글씨를 볼 수 있었다. 대개는 정자체가 아니고 삐뚤빼뚤 페인트로 쓴 글씨가 아래쪽으로 번지기까지 했으니, 변소라는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셈이었다. 그 뜻을 몰랐어도 지저분한 주변, 향기롭지 못한 냄새로 은밀한 일을 해결하는 곳이..

시간여행 2025.03.15

포도주 양조장에 다녀와서

서양 식당에 가서 병째로 포도주를 시키면 웨이터가 병마개를 따고 일행 중 누가 대표로 시음할 건지 묻는다. 대표 선수가 선정되면 웨이터는 잔에 포도주를 조금 따라서 정중한 태도로 시음자에게 건넨다. 그러면 대표 선수가 시음하고 나서 대개는 좋다고 의사 표시를 하면 웨이터는 함께 온 모든 사람에게 한 잔씩 정량을 따라준다. 나는 그런 적이 없지만, 간혹 외국인들은 시음 후 마음에 안 드니 다른 술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포도주 양조장에서 정식으로 시음하는 건 절차가 조금 복잡하다. 양조장에서 생산한 포도주 중에서 손님이 원하는 술 대여섯 가지를 한 병씩 앞에 둔다. 선택하는 술의 종류가 늘어나면 시음료를 추가로 내야 한다. 병마개는 이미 따져있다. 술의 특성을 설명한 설명서가 ..

미국 생활 2025.03.11

트레이너와 물리 치료사

트레이너와 물리치료사는 모두 건강과 신체 개선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의 역할과 전문성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현장에서는 그들의 영역이 엄격히 구분되지 않고 서로 조금씩 넘나드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매일 나가는 체육관에서 트레이너로 일하는 민디라는 아가씨는 180cm가 넘어 보이는 장신에, 몸매도 아름다운데다가, 회원들을 보면 늘 미소를 짓기에 나도 그 아가씨를 보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며칠 전이었다. 회전근개 운동 기구에 앉고 보니, 옆 기구에 전동 휠체어에 앉은 젊은이가 있었다. 아마도 하체에 장애가 있는 듯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꺽다리 트레이너 아가씨가 허리를 구부려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열심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운동하기 싫다는 그를 아기 다루듯이 설득하고 있었다..

교통사고 이후 2025.03.10

우리 동네 인터넷 사랑방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참여하여 꾸려나가는 ‘Nextdoor.com’이라는 블로그도 아니고 카페도 아닌 사랑방 또는 수다방이 있다. 참여하고 처음 본 게시물은 ‘집 나간 고양이를 찾습니다,’라는 것이었는데, 고양이 사진과 특징을 적은 글이었다. 그렇고 그런 제보가 올라오더니 바로 그다음 날 고양이가 귀가했다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사랑방에 올라오는 글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동네 외과 의사가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더라.-외출하다가 어디에 교통사고 난 걸 보았는데, 사고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알려 달라.-안 쓰는 가구를 거저 줄 테니 희망하는 사람은 연락 주기 바란다.-욕실을 개조하려고 하니 믿을 만한 업자를 소개해 달라.-자동차 속지 않고 살 수 있는 비법을 알려 줄 사람 없소?-..

미국 생활 2025.03.01

나는 겨울이 참 싫다

어느 여론조사업체에서 미국인 15,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싫어하는 계절에 관해 물었더니 절반 가까이가 겨울이 제일 싫다고 답했다. 나도 겨울이 참 싫다.  날씨가 추우면 기온이 떨어지고 내 기운도 덩달아 떨어진다. 늦은 아침, 일어나야 할 시간인데도 창밖은 어둡고, 오후 네 시면 벌써 어두워서 가로등이 켜지고 게다가 흐린 날씨가 이어지면 우울해진다. 망가진 다리의 통증도 심해지고, 그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때가 잦다. 나만 아픈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날씨가 추우니 몸이 불편하다거나 아프다는 얘기를 자주 듣게되니 나도 덩달아 우울해진다. 다들 아프지 말아야 할 텐데. 겨울에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많다. 성당 교우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가끔 전해 듣고, 한국에 있는 동창생들의 부음도..

미국 생활 202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