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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제가 열 살이었을 때의 일입니다.우리 가족이 미국에 이민 온 지 몇 년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 가족이 함께 한국을 다녀왔습니다. 귀국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는 공항 입국 심사와 통관 줄에 서 있었습니다.그 당시 우리는 미국에 7년이나 살았지만, 아직 시민권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세관 직원은 여권을 확인한 뒤 우리에게 가볍게 말했습니다.“환영합니다.”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그는 우리를 돌아보며, 놀란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그가 '환영합니다'라고 했어. 들었니? '환영합니다'라고. 우리, 집에 돌아온 거야.” 그 직원은 아마도 그 순간을 바로 잊었을 겁니다. 하지만 제 아버지에게 그 두 단어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왜일까요?그 말이 너무도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수년간 부..

가족 이야기 2025.07.16

삶의 한계를 초월한 영웅, 크리스토퍼 리브(Christopher Reeve)의 이야기

영화 슈퍼맨 시리즈의 주연 배우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브는 1985년, 안나 카레니나 촬영을 위해 처음 승마를 시작했다. 그러나 1995년 5월, 승마 경기 도중 말이 장애물 앞에서 멈추면서 그는 낙마했고, 경추 두 곳이 골절되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목 아래로 감각을 잃고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의식을 회복한 리브는 깊은 절망의 늪에 빠졌다. “가족에게 짐이 될 것이다”, “내 인생은 끝났다”고 절규한 그는 더 이상 삶을 축복으로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이 책임감 있는 선택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차라리 날 떠나게 해주는 게 나을지도 몰라”라고 말했을 때, 그의 아내 다나는 눈물로 답했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에요. 그리고 난 당신을 사랑해요.” 이 말은 단순한 위로..

교통사고 이후 2025.07.15

좁은 길목의 침입자, 말벌과의 전쟁

며칠 전부터 우리 집으로 이어지는 좁고 짧은 길에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은 곤충 몇 마리가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곧이어 웅웅거리는 날갯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벌이겠거니 했지만,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따라붙고 맴도는 위협적인 움직임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주변을 살펴보다가 마침내 침입자의 본거지를 발견했다. 바로 적산전력계 상자 밑에, 회색 종이로 감싼 듯한 제법 큰 말벌 둥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둥지 아래쪽 작은 구멍으로는 말벌들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마치 작은 공항처럼 활기찼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말벌이 위험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1) 공격성이 매우 강해서 소리, 진동, 혹은 가까이 가는 것..

미국 생활 2025.07.08

결핍의 자리에서 풍요를 보다

최근 큰딸이 아비에 관해 쓴 글 중 다음의 한 대목을 읽으며 나는 참 부끄러웠다. “아버지의 삶은 겉보기엔 고난뿐인 인생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전통적인 기준으로 보면, 아버지가 얻은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른 이들이 결핍만을 보는 자리에서 풍요를 발견하는 시선은 아버지가 제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이재(利財)에 서툰 아비를 이렇게 미화해준 딸이 참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즐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박완서 작가가 “청빈이란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가난은 그냥 가난일 뿐인데, 그 앞에 ‘청(淸)’자를 붙여 그럴듯하게 포장한다”고 일갈..

가족 이야기 2025.07.05

전공을 넘어서: 엘론 머스크와 엉뚱한 도전들

엘론 머스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유펜)에서 물리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전공과는 거리가 먼, 훨씬 더 넓고 깊은 세계에서 이뤄졌다. 온라인 결제 시스템 ‘페이팔’, 전기차 ‘테슬라’, 우주로켓을 쏘아 올리는 ‘스페이스X’, 인공지능 개발을 위한 ‘오픈AI’,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연구하는 ‘뉴럴링크’, 지하 터널을 파는 ‘보링컴퍼니’까지—그의 손이 닿은 분야는 놀라울 만큼 다양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공은 단지 출발점일 뿐이다.” 실제로 그는 그 말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학위나 전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배우는 힘과 새로운 길에 도전하려는 용기임을 보여준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는 이런 보도가 나왔다. “공장에서 도시 반대편 고객의 집까지, 고속도로..

이것저것 2025.06.29

아직도 아버지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20년 전 오늘, 제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차구역에서 차에 치여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변호사 시험을 4주 앞두고 요약 자료와 플래시카드에 파묻혀 있었는데, 그때 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보다 일주일 전, 부모님이 코네티컷으로 올라오셔서 저를 방문하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딸기를 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이 사진은 그날 오후에 찍힌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드물게 찾아온 평화롭고 좋은 날이었기에, 지금 생각하면 그 기억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그날은 이제 ‘그 전(前)’의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두 달을 보내셨고, 그 대부분은 의식불명 상태였습니다. 이후 재활 치료를 위해 6개월을 더 병원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시험 ..

가족 이야기 2025.06.28

오늘 또다시 좋은 아침을 맞으며

2005년 6월 27일 오전 10시 40분, 나는 길가에 주차한 내 차의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강한 충격에 쓰러져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어떤 남자아이가 차를 몰다가 갑자기 핸들을 꺾는 바람에 내 차 뒤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을 들이받았다. 그 차량은 연로한 미국인 수녀님의 낡은 차였는데, 다행히 그 안에는 아무도 없어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수녀님의 차에 밀린 내 차가 길 건너편으로 튕겨 나가며 지나가던 남미 출신의 노인을 쳤고, 그분은 병원 치료를 받던 중 말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도 불법 체류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랬을 것이다. 그 사고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후 소식은 알지 못한다. 수녀님의 차와 내 차..

교통사고 이후 2025.06.27

정전의 밤, 고마움을 배우다

며칠 전 저녁 식사 중, 갑자기 비가 몰아쳤다. 세찬 바람 소리, 빗소리,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 등이 10분쯤 이어지더니 전기가 나갔다. 서둘러 플래시를 챙기고 초를 켠 뒤 창밖을 내다보니, 가로등도 꺼져 있었고 우리 콘도 단지의 대부분 창문도 캄캄했다. 다행히 비는 곧 그쳤다. 그런데 몇몇 집의 창이 밝게 빛나 의아했는데, 잠깐 집 주위를 둘러보고 돌아온 아내가 말하길, 그 집들은 미리 배터리로 작동하는 랜턴을 준비해 두었더라고 했다. 우선 스마트폰을 충전용 파워뱅크(Power bank)에 연결하였지만, 충전 용량이 바닥나면 어쩐다? 충전이 가능한 공공장소를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생각만 해도 번거롭고 짜증스럽다. 다행히 인터넷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복구되어 5G를 통해 사용할 수 있었다. 바로 아마..

미국 생활 2025.06.24

코스모스를 다시 펼치며

칼 세이건(Carl Sagan, 1934–1996)은 미국의 천문학자이며, 과학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과학을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답게 설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에 제작된 TV 시리즈 『코스모스』는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며 과학 다큐멘터리의 고전이 되었다. 나는 45년 전, 큰마음 먹고 그의 대표 저서인 『코스모스(Cosmos)』를 구입했지만, 앞부분만 조금 읽고는 덮어 버렸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건, 그가 장차 태어날 딸 사샤에게 남긴 헌정문이 무척 인상 깊었다는 사실뿐이다. 1980년 초판본에 실린 헌정문은 다음과 같다.“사샤에게, 우리가 살아남을 만큼 현명하다면, 21세기의 첫해를 보게 될 그 아이에게 이 책을 바친다.”나는 ..

이것저것 2025.06.21

영감탱이의 작은 승리

아침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각, 현관문을 열고 외등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꺼져 있었다. 자동으로 점등되는 외등이라는 것은 당연히 바깥이 어두우면 켜지고 밝으면 꺼지는 법. 그런데 우리 콘도미니엄 건물의 외등 점등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무려 열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켜져 있었다. 대낮에도 환하게 켜진 외등을 보면서도, 이웃 노인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열흘 전, 내가 사는 건물 열여섯 가구 전체의 외등이 낮에도 켜져 있는 걸 보고 사진을 찍어 단지 관리인 빌(Bill)에게 보내며 수리를 요청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여전히 불이 켜져 있어 산책길에서 마주친 빌에게 전력 낭비가 없도록 빨리 수리하라고 강하게 말했다. 그는 관리회사에 연락했으니 곧 해결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

미국 생활 202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