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뭐가 있었을까? 개인용 컴퓨터도 없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니 책상 위에는 탁상용 전화기, 필기도구 그리고 업무 참고용 책 두어 권 정도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과장의 지시에 따라 매일 작성하던 업무일지, 기안 용지와 통신문 같은 양식 몇 가지와 사본 작성용 먹지도 늘 놓여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대부분의 업무가 전화와 종이로 이루어지던 시절이니 이런 정도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면 계산은 무엇으로 했을까? 내가 신입사원 시절에 근무하던 업무부에는 직원이 20여 명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공용으로 사용하던 보물이 하나 있었다. 사무실 뒤쪽 복판에 원탁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 쇠줄로 원탁 다리에 묶어 놓은(누가 훔쳐 갈까 봐) 최신형 전자계산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전자계산기라고 하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등의 기본적인 기능만 있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것인데 그 당시에는 그것도 귀중품이라고 한 대밖에 없어서 순서를 기다려서 쓰고 퇴근할 때에는 전자계산기 보관 책임자인 꺽다리 사원(김영달, 나중에 업무 담당 이사가 됨)이 쇠줄을 풀어서 캐비넷에 넣고 잠가두었다.
입사하고 며칠 후 선배 사원(문원욱, 나중에 상사로 전보되고, 퇴사 후 목사가 됨)이 계산기 사용하는 직원이 없을 때 나를 원탁으로 불러서 “김형, 이거 배워두면 도움이 많이 될 거요.”라며 자상하게 사용법을 설명해 주었는데 워낙 기능이 간단해서 배우는데 채 5분도 안 걸렸다.
어느 날 저녁 직원들 대부분이 퇴근한 시간에 차관 도입 관계 업무로 경제 기획원(이었던가?)에 출장 나갔던 과장(석광세)과 그 선배 사원이 돌아와서 기다리던 부장에게 출장 결과를 급히 보고하려고 서류 정리를 하다가 계산이 좀 이상하다면서 전자계산기를 찾았는데 그걸 모셔둔 캐비넷의 열쇠를 가진 꺽다리 직원은 이미 퇴근한 후였다. 당황하는 과장에게 주산으로 계산해 주겠다고 했더니, ”당신이 어떻게? 곱하기, 나누기도 해야 하는데.”라고 좀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날 초조히 기다리던 부장에게 무사히 보고를 끝내고 수고했다며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자리에서 서울 법대 출신인 과장이 신기해했다. “당신 주산은 언제 배운 거야?” 그 이후로도 내 주산 실력으로 과장이 위기를 넘긴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신입사원 시절을 지나고 지금까지 오랫동안 주산을 만져 본 적도 없고 어릴 적에 아끼던 일본제 주판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가끔 쌀통에 넣어 문지르며 반들반들 길들여 놓은 소중한 물건이었는데.
사실은 시골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주산을 과외활동으로 시작해서 여름 방학이 되면 한 달 내내 학교에 가서 열심히 연습하고 상업학교와 함께 있던 시골 중학교에서도 주산을 열심히 연습했기에 내 주산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공과대학에서는 특수 계산을 하기 위해 공학용 계산척(Slide Rule)을 배웠는데, 지금은 모두 쓸모가 없어졌다. 개인용 컴퓨터가 널리 보급된 시대에 그런 물건이 아직 있기나 할까?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폰 사용이 익숙하고, 이런 기기가 없으면 업무를 볼 수 없는 후배들이 들으면 믿어지지 않을 얘기지만, 당시에는 모든 업무가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흘러갔다.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업무가 없을 때였으니 대부분의 업무가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이루어지는 방식이었으니 사람 사이의 정을 느낄 수는 있었는데 요즈음은 인간관계가 좀 삭막해진 건 아닌지 모르겠다.
(2021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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