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고장 난 냉장고가 왜 그리 많았던지

삼척감자 2022. 9. 3. 00:34

냉장고는 냉매가 기화될 때 열에너지를 흡수하는 성질을 이용한 장치이다. 냉장고는 크게 증발기, 저장고(음식을 저장하는 곳), 압축기(냉매를 펌프로 압축하여 응축기로 보내는 장치), 응축기로 구성되어 있다. 냉장고는 부피가 큰 부품 몇 개를 동파이프로 연결하여 냉매가 순환하게 하는 간단한 기계 장치다. 응축기나 증발기는 고장 날 일이 없는 부품이고, 압축기도 고장 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80년도를 전후한 어느 해에는 고장 난 냉장고 수리 의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와서 수리실을 가득 채우고도 공간이 부족해서 임시로 창고를 얻어야 할 정도였다. 고장은  대부분 구리 파이프 어딘가에 뚫린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멍을 통해 서서히 냉매가 새기 때문에 냉각 기능을 잃는 것이었다.

 

미세한 구멍을 맨눈으로 찾을 수 없으니 동파이프를 떼어내어 물이 가득 담긴 큰 대야에 집어넣고 압축 공기를 집어넣으며 기포가 올라오는 걸 관찰하는 방식을 썼는데, 워낙 구멍이 미세해서 때로는 여러 시간 앉아서 지켜보다가 기포가 올라오는 순간 얼른 그 자리에 표시해 두었다가 용접하고 다시 냉매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수리를 하니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여름철이라 소비자들의 재촉은 불같은데 수리는 더디고도 더디었고 서비스 센터장(그때는 직장이라고 불렀다)과 과장인 나의 속은 매일 타들어 갔다. 

 

매일 밤 전기 기사 두 명(용접 담당 1, 냉매 주입 담당 1)과 전기 팀장, 센터장 그리고 나는 밤 열한 시까지 사무실과 작업장을 지켰다. 자원해서 함께 근무하며 잔일을 도와주겠다는 기사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 짜장면 한 그릇 말고는 다른 보상도 없이(잔업 수당도 없을 때였다) 묵묵히 일했다. 때로는 밤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 날 출근해서 작업장을 둘러보는데 용접 담당 기사가 지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쁜데 빨리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마디 했더니,

신쭈(진유(眞鍮)=용접봉=소모품)가 있으야 일을 하지유

얼른 사 와요

바쁜디 언제 사러 가유? 사다 주서유.”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어서 눈치만 보고 지내던 친구가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하늘 같은 과장에게 유세를 부리는 꼴이 우스웠지만, 몸값이 상종가를 치는 귀하신 몸인데 어쩌겠나. 얼른 센터장에게 그걸 사다가 대령해 놓으라고 지시했다. 매일 몸 아끼지 않고 일하는 직원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지만, 주일 근무나 연장 근무를 당연하게 여기던 그들이야말로 회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만족스럽지 않은 처우를 감내하며 1등 회사에 다닌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던 그들이었는데 지금은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언젠가 만나서 술 한잔 하며 옛날 얘기를 나누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락이 끊긴 지 너무 오래되었고 다들 나이 들어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우리 성당을 방문한 분의 얼굴이 낯이 익기에 물어보았더니 그분이 바로  오래 전에 대전에서 우리 회사에 좋은 조건으로 창고를 임대한 분이었다. 다시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다시 만나게 된다는산티아고 가는 길의 법칙을 믿게 된 순간이었다. 인생 여정에서 어떻게 헤어지든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만난다니 함께 고생하던 옛날 직원들도 언젠가는 또 만날 수 있게 되겠지.

 

(2021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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