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냉장고에 화재 발생

삼척감자 2022. 9. 3. 03:57

위니아 딤채김치 냉장고에 화재가 발생한 사례가 지난 몇 년간 수백 건에 달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니 40년 전 서비스 과장 시절에 겪은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금성 소형 냉장고에 가끔 불이 났다. 모두 냉장고 부품에 불이 붙었다가 꺼지는 정도였을 뿐, 다른 데로 번져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객에게서 그런 신고가 접수되면 바로 직속 상관에게 보고한 다음 경험 많고 설득력이 뛰어난 서비스 기사를 현장에 파견했다. 그러면 서비스 기사는 제품을 대량 생산하다 보면 어쩌다 한두 개 정도는 이런 불량품이 나올 수 있다. 바로 새 제품으로 교환해 드리겠다.”고 약속하고는 대리점에서 새 제품을 빌려서 바로 당일로 고객에게 인도하면, 대개 고맙다는 인사까지 받으며 원만하게 처리되곤 했다. 나는 그런 서비스 기사를 대할 때마다 직급은 낮아도 이런 사람이 회사의 소중한 자산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충주 연락소장이 큰일 났다며 전화했다. 바로 그 소형 냉장고에 불이 났는데, 고객이라는 인간이 만만치 않더라고 하소연했다. 저녁에 여관에서 연락소장과 함께 만난 그 인간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나보다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젊은 놈이 여유 있게 실실 웃어가며 얘기하는 꼴이 이참에 한밑천 건지겠다는 결의가 엿보였다. 촌놈이라고 우습게 보다가는 큰코다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건을 이따위로 만들다니 말이 됩니까? 나는 괜찮지만, 남들이 이런 피해를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중앙일보에 제보할까 합니다.”

선생이 손해 본 건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냉장고 새걸로 당장 교체해 드리겠습니다.”

그놈은 씨익 웃더니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손해 보지요. 그렇지만, 중앙일보에 제보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적당한 선에서 협상을 하려고 그 인간과 연락소장 그리고 나 사이에 끈질긴 줄다리기 이어졌다.

우리가 보상 금액을 제시할 때마다 엉덩이를 치켜들며 바로 경쟁 업체인 S 전자나 중앙일보로 뛰어갈 듯했지만, 우리가 말리면 못 이기는 체 주저앉기를 거듭하는 사이에 동이 트려고 했으니 밤새도록 밀고 당기고 한 셈이었다. 아군은 지쳐 가는데 적군은 끄떡없었다. 중앙일보에 금성 냉장고에 화재. 심각한 불량 발생이라는 기사가 뜨는 걸 상상만 해도 겁이 났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놈의 요구 사항을 물어보았다.      

 

도대체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o원을 주신다면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만…”

아니 너무 과한 요구가 아닙니까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그놈은 또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두말할 것 없소. 바로 서울로 가겠습니다.”라며 뛰쳐나갈 기세였다.

연락소장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그를 만류하며

아니 김 과장은 정신이 나갔소?”라며 나에게 화를 내었다.

이렇게 아군 사이에 자중지란이 일어나며 패색이 짙어졌다. 이른 새벽에 상부에 전화하여 그놈 요구를 들어주는 걸로 승낙을 받았지만, 입맛이 썼다. 밤을 꼬박 새우고 밀고 당기고 했는데, 촌놈 한 놈 설득하지 못해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생각에 입맛이 썼다. 새벽에 여관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연락소장과 함께 아침을 하며 언제까지 이런 악덕 소비자에게 당해야 하는지 개탄했지만, 뚜렷한 묘안은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내가 미국에 산 지도 오래되며 언론에 보도되는 미국 소비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사례를 보니 40년 전 내가 상대한 촌놈은 악덕 소비자가 아니고 착한 소비자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비스 부서는 결코 회사 내에서 끗발 있는 조직이 아니다. 평소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서 외롭지만, 품질 문제로 문제가 생기면 눈총을 받는다. 아무 일 없이 평온할 때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부서이지만, 문제가 생기면 생산 부서에서 책임질 문제를 업무 처리가 매끄럽지 못했다는 이유로 문책을 받을 수 있는, 늘 당하기만 하는 부서이다.

 

지금 한국의 서비스 조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미국식으로 대부분의 업무를 외주 대행하는 방식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어떤 조직 체계에서 업무가 수행되든 부디 음지에서 일하는 서비스 업무 종사자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두시기 바랄 뿐이다.

 

(2021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