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생활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삼척감자 2025. 10. 25. 23:20

P씨가 자신이 활동하는 단체에서 찍은 사진이 많은데, 그걸 모두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만성적인 물 부족으로 고통받는 잠비아에 우물을 파주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 활동에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늘 생업도 뒤로 미루고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기도 했지만, 일단 거절하고 다른 분을 추천했다.

 

10년 전쯤 딱 한 번 파워포인트를 만들어 본 적이 있어 내 실력은 초보자 수준이라, 전문가인 R씨가 만들면 더 아름답게 만들 거라는 얘기를 했지만, 사실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파워포인트가 뭐 별건가. 그냥 뚝딱 만들면 되지만, 꼼짝없이 매달릴 시간이 아까웠고, '내 일도 아닌데' 하는 생각에 거절하기는 했지만, 좋은 일에 도움을 주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나 성당에서 만난 P씨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길래 파워포인트 제작 일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 왔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R씨에게도 거절당했다며 USB 한 개를 내밀었다. 짜증스럽기는 했지만, 어쩌겠나? 그도 생면부지의 타민족을 돕겠다고 나에게까지 머리를 숙이는데. 그렇게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떠밀려서 작업을 시작했다.

 

파일을 열어서 400개 가까운 사진을 보니 후회가 밀려왔다. 숫자도 예상보다 훨씬 많았고, 사진 대부분이 가로로 찍힌 것을 세로로 돌려 세워야 했으며, 화질이 매우 높아 화질을 낮춰야 했고, 파워포인트 화면에 맞게 규격과 명암까지 조절해야 하는 등...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가 소속된 단체의 책임자인 L씨에게 전화로 불평했더니, “행님, 힘들어도 고마 도와 주이소. 다 좋은 일인데.”라고 답했다. 이 친구의 촌스러운 말씨만 들으면 순식간에 무장해제되는 건 왜일까? 내가 모질지 못하고 착해서 그런 건 아닐 텐데. 열흘 정도 걸릴 거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괜한 일을 떠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에 필요한 보충 자료를 찾다가 한 잠비아 어린이가 “WATER IS LIFE”라고 쓰인 두꺼운 종이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포장용 상자를 자른 것 같았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훑어보니 물 부족 때문에 그들이 받는 고통이 매우 심각한 듯했다. 웅덩이에 고인 흙탕물, 그리고 그 곁에 놓인 갖가지 비닐 용기들을 보니 아마도 그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듯했다. 물통을 들고 황톳길을 줄지어 걷는 사람들. 깡마른 모습에 지친 표정으로 맨발로 걷는 그들을 보니 고단한 삶이 쉽게 짐작되었다.

 

우린 가난했어도 신발은 신었는데 그들은 모두 맨발이잖아요. 물 한 통 구하려고 그렇게 몇 시간을 오간답니다.”라던 P씨의 말이 생각났다. 전쟁 직후, 신발이 떨어지면 기워 신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 어린 시절에는 왕자표나 기차표 고무신을 신었다. 하지만 사진에 나오는 사람 중에는 그런 고무신이라도 얻어 신은 사람을 보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가난했어도 물을 그야말로 물 쓰듯 하며 살아서 물 귀한 줄 모르는데 잠비아 사람들은 물만 있어도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훑어보고 나니 마음이 바빠졌다. P씨가 이번 주일에 뉴욕에 있는 어느 성당을 방문해서 모금한다던데. 빨리 파워포인트를 만들어서 그때 쓸 수 있게 해주어야 할 텐데. 그래서 열흘 잡았던 일을 이틀 만에 마쳤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단순 작업을 쉴 새 없이 반복했더니 몹시 피곤하여, 일을 마치고 이틀 정도는 푹 쉬는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체력이 쉽게 떨어짐을 실감했다.

 

작업하는 동안 내내 사진에 나오는 유일한 한국인이 누군지 궁금했다. 운전, 짐 나르기, 땅파기, 양수기 설치 및 작동 등의 사진마다 그가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한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냥 평범한 인상의 그가 누굴까? 아마도 양수기 전문 기술자가 특별히 파견된 것일까 생각했다. 토요일에 작업한 파워포인트를 건네주고 작동 방법을 설명해 주려고 P씨를 만나 물었더니, 그분이 바로 프라치스코회의 김기수 신부님이라고 해 놀랐다. 나이 70이 다 된 분이 그런 고된 일을 하신다니!

 

주말에는 성당을 찾아 우물 파기 기금 마련을 위한 모금 활동을 해야 하기에, 평일에만 일하는 직장을 찾기가 쉽지 않아 요즘은 거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P씨의 말을 들으니, 이전에 사소한 일이라며 거절했던 것이 참 미안하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나이 덜 먹었을 때 열심히 봉사하겠다는 그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그가 달리 보였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마태 25, 35) 이 성경 말씀을 골라 파워포인트의 마지막 슬라이드에 넣으며, 염치없지만 주님께서 내가 잠비아의 목마른 이에게 물 한 방울이라도 준 것으로 인정해 주시기를 빌었다.

 

(2017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