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간헐적 금주

삼척감자 2025. 11. 27. 22:26

요즈음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얼마 전 가까이 지내던 교우가 고국으로 영구 귀국한다기에 송별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날 취하도록 마신 뒤로 벌써 한 달하고도 반 달이 넘도록 술에 취해 본 적이 없다. 가끔 저녁 식탁에 안주 삼아도 좋을 반찬이 올라오면 위스키 한두 잔 정도는 곁들이곤 하니 단주(斷酒)라고 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마시는 것도 아니니 금주(禁酒)라 해야 할까? 가끔 홀짝거리기도 하니, 차라리간헐적 금주라는 표현이 적당할 듯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매우 술을 즐기던 사람이었다. 물론 두주불사(斗酒不辭)로 이름나 주선의 경지에 오른 아버지에게는 턱없이 못 미쳤지만, 젊은 날의 나는 남들 못지않게 자주, 또 많이 마셨다. 1 365일 퇴근 후 거르지 않던 음주는 당연한 일상이었고,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의 잦은 술자리는 언제나 자연스럽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술꾼에겐 꽃병도 술병으로 보이고 / 김치보시기도 술잔으로 보인다라는 시 구절을 보며이건 내 얘기구나생각할 만큼 자타 공인 애주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며칠 술을 마시지 않아도 별로 생각이 나지 않기 시작하니 신기한 일이다. 예전처럼 잔을 기울일 일이 있어도 소주 반 병쯤 넘기면 더는 입에 당기지 않았다. 몸이 거기까지만 허락하는 듯했고, 나 역시 굳이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이가 들며 찾아온 변화일 것이다. 예전 같으면 들뜬 자리에서 기분 좋게 술잔을 연거푸 비웠겠지만, 이제는 몸이 알아서 과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마음은 여전히 젊은 시절의 술자리를 기억하는데, 몸은 어느새 다른 생체 리듬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위스키 잔을 손끝에 잡고 있노라면내가 이렇게 변하는구나하는 생각이 스며든다. 아버지가 원 없이 마시다가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뒤 정신없이 지나온 세월, 천천히 달라져 온 나 자신까지. 금주라고 부르기엔 어색하고, 단주라고 하기엔 멀지만, 이렇게 가끔 조금만 마시는 지금의 내 모습이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

 

어쩌면 술이 아니라 시간이 나를 변화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잔을 비우는 횟수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어떤 것들은 조용히 가라앉고 어떤 것들은 더 선명해지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간헐적 금주라는 다소 우스운 이름을 붙인 이 새로운 생활 방식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예전의 나도 좋았지만, 지금의 나도 그 나름대로 괜찮다. 술을 마시는 일이 줄어드는 만큼 몸과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하다.

 

그래도 언제 어디서 만나도 반가운 술 친구들이여, 이 글을 읽고 행여 내가 단주(斷酒)했다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예전보다 덜 마실 뿐이지, 내가 어찌 술을 끊을 수 있을까. 어쩌면간헐적 금주라는 이야릇한 표현 자체가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는 미련을 슬쩍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25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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