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옛 시절을 위하여, 낭만을 위하여

삼척감자 2025. 12. 31. 21:36

한 해의 마지막 날이면 나는 늘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을 찾아 듣는다. 밤 열두 시가 지나 새해가 되면 방송에서는 마치 축가처럼 이 노래를 크게 틀어 준다. 그러나 이 노래는 새해를 맞이하는 노래라기보다, 옛 정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노래에 가깝다. 스코틀랜드에서 비롯된 이 노래는 “Should auld acquaintance be forgot (옛 친구를 잊어야 할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질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잊지 말자는 마음을 담은 노래다.

 

이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한 장면은 많지만, 내게 특히 깊이 남아 있는 것은 영화애수(Waterloo Bridge)’의 한 장면이다. 1차 세계대전 중 런던의 무도회장. 군인들과 여인들은 잠시 전쟁을 잊고 춤을 춘다. 그러나 모임이 끝날 시간이 다가오자 밝은 분위기의 왈츠는올드 랭 사인으로 바뀐다. 그 순간 무도회장은 작별의 공간이 된다. 웃음은 멈추고, 사람들은 서로를 꼭 안거나 말없이 손을 잡는다. 남자 주인공 로이(로버트 테일러)는 전쟁터로 떠나야 하고, 여주인공 마이라(비비언 리)는 그를 배웅한다. 두 사람의 눈빛에는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담겨 있지만, 아무도 확실한 답을 할 수 없다.

 

오늘이 2025년의 마지막 날이라올드 랭 사인을 찾다 보니, 문득 최백호의낭만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두 노래를 곱씹어 보면 묘하게 닮아 있다. ‘올드 랭 사인옛 시절을 위하여, 내 벗이여라는 가사와, ‘낭만에 대하여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라는 가사에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과 감정이 담겨 있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두 노래는 지나간 세월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기억할 뿐이다.

 

올드 랭 사인속 사람들은 함께 시냇물을 저으며 하루를 보내던 친구들이다. 하지만넓은 바다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는 구절처럼, 세월은 결국 사람들을 흩어 놓는다.
낭만에 대하여에서도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이라는 구절처럼, 돌아올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있다. 두 노래는 누군가가 떠난 뒤에 남은 마음을 이야기한다.

 

두 노래 모두 술과 음악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올드 랭 사인한 잔을 들어 옛 시절을 위하여라고 말하고, ‘낭만에 대하여는 늦은 밤 다방에서 위스키와 색소폰 소리를 불러온다. 술과 음악은 기억을 꺼내는 열쇠가 되어, 지난 시간을 조용히 데려온다.

 

이 노래들이 진짜 가슴을 울리는 것은 인생이 어느 정도 저물었을 때인 듯하다. 젊을 때는 느리고 조금은 청승맞게 들리던 노래가, 세월을 몇 굽이 돌아온 뒤에는 이상하리만큼 가슴을 친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사라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올드 랭 사인이 말하는옛 시절낭만에 대하여가 말하는낭만은 결국 같은 뜻일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 그래서 이 노래들은 슬프기보다 고요하고, 아프기보다 따뜻하다. 무엇을 다짐하지도, 되돌리려 애쓰지도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되돌릴 수 없기에 우리는 기억하고,
기억하기에 낭만은 남는다.

 

(2025 12 31)

 

올 한 해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건강과 평안이 늘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www.youtube.com/watch?v=UwBPODDH5Q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