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시간이 흐르며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달라진다.
한국에서 살 때는 음식마다 빠지지 않던 간장과 고추장이 어느새 멀어지고, 그 자리에 올리브오일과 치즈, 이름도 낯선 중국식과 미국식 소스들이 들어선다. 재료가 바뀌면 요리가 달라지고, 요리가 달라지면 입맛도 서서히 바뀐다. 그 변화는 세월처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스며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식사는 점점 간소해진다. 며칠 동안 김치가 식탁에 오르지 않아도 알아채지 못하며 지낸다. 아침에는 대개 빵과 과일, 혹은 야채로 간단히 차린 식사가 놓인다. 미국식인지 건강식인지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 저녁에는 가끔 파스타 한 접시에 와인 한 잔이면 충분한 날도 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남성이 주방에 서서 음식을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는 모습도 그리 낯설지 않다. 남녀 평등이라기보다, 서로 돕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다. 나 역시 가끔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하거나 요리를 거든다. 한쪽 다리에 의족을 끼고, 양팔에 클러치를 짚어야 걸을 수 있지만, 주방 조리대에 기대어 균형을 잡으면 부엌일이 크게 어렵지는 않다. 요리나 설거지는 다리로 하는 일이 아니라, 주로 두 손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강원도식의 맵고 짠 음식이 문득 그리워지는 날이면, 나는 임시 요리사를 자청한다. 실수인 척 간장과 고춧가루를 넉넉히 넣고 만든 음식을 두고 퓨전 음식이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나 자신도 이것이 무슨 음식인지 잘 모른다. 파스타에 고추장을 뿌리기도 하고, 간장을 조금 넣기도 한다. ‘Eggs in Hell’이라 불리는 샥슈카라는 요리에는 감자를 채 썰어 넣고, 두반장 같은 중국 소스를 더하기도 한다. 굴소스는 동서양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생각나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뿌린다.
이른바 퓨전 음식은 새로운 맛을 찾아 나선 요리가 아니다. 완전히 서양인이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옛날의 한국인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삶 속에서 음식은 말없이 타협한다. 양식에 스며든 한식의 맛은 내가 걸어온 시간의 흔적이고, 한식에 더해진 서양식 조리법은 오늘을 살아내는 지혜라고나 할까.
집에서 반 마일쯤 떨어진 곳에 중국인이 주인인 동양 식품점이 있다. 그 덕분에 내가 만드는 음식에는 알게 모르게 중국 소스가 자주 들어간다. 몇 해 전 근처 사천식당에서 먹어본 단단면이 입에 맞아, 유튜브를 찾아보며 흉내를 내다 보니 어느새 제법 그럴듯한 맛이 난다. 가끔 아내의 부탁으로 돼지고기를 볶고, 국수를 삶아 땅콩버터를 넣고, 데친 청경채를 얹은 단단면을 만들어 내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며칠 전 ‘한국식 파스타’라는 요리를 알게 되었다. 냉장고에 있던 새우와 쪽파, 양파, 마늘에 간장과 굴소스만 있으면 충분했다.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파와 양파를 볶으면 부엌에 익숙한 냄새가 번진다. 새우를 넣고, 파스타 소스에 고춧가루와 마늘, 간장과 고추장을 섞은 양념을 더한다. 낯선 조합이지만 코끝에 닿는 향은 어쩐지 집밥 같다.
물을 붓고 면을 그대로 넣어 끓인다.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면 면은 부드러워지고 국물은 자작해진다. 접시에 담아 젓가락이나 포크로 천천히 먹는다. 이제 와인 한 잔을 따르고, 아내에게 뻐기면 된다.
(2026년 1월 4일)
한국식 파스타의 레시피는 댓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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