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저녁, 아내가 셔츠를 걷어 올리며 배를 좀 보라고 했다. 갈비뼈 아래가 뜨끔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말에 아내의 맨살을 살피니, 붉은 점 몇 개가 마치 피어오르는 불꽃처럼 돋아나 있었다. 대상포진의 초기 증상 같았다. 당장은 견딜 만하다기에 하룻밤을 보냈으나, 다음 날 온라인을 뒤지며 확신은 두려움으로 변했다.
대상포진은 첫 발진 후 72시간이라는 '골든타임' 내에 항바이러스제를 처방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짧은 시간을 놓치면 지독한 신경통의 굴레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 "내일이면 낫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는 사라졌다. 무척 고통스러웠다던 지인들의 이야기가 떠오르자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주치의나 전문의를 만나려면 며칠 기다려야 한다. 그들에게는 예약된 환자가 늘 밀려 있기 때문이다. 72시간의 시계는 이미 돌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그때 머리를 스친 곳이 집 근처 '어전트 케어(Urgent Care/Immediate Care)'였다.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곳이라지만, 진료소에서 서류작성에 기다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서둘러 웹사이트에 접속해 이른 아침 시간을 선점했다. 보험 증서와 신분증을 올리고, 병력(病歷)과 알레르기를 꼼꼼히 기록한 뒤 '주요 언어: 한국어'라는 항목에도 표시를 남겼다.
이튿날 아침, 진료소 문을 열자마자 이미 온라인으로 올린 서류 덕분에 곧장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대상포진이었다. 의사는 즉시 동네 약국으로 처방전을 전송했고, 아내 손에는 한국어로 된 상세한 설명서 십여 쪽이 들려 있었다. 진료소를 나와 차에 오르기도 전에 약이 준비되었다는 메시지가 휴대전화를 울렸다. 그 기민한 연결망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살다 보면 몸은 가끔 낯선 신호를 보낸다. 미국의 의료 체계는 처음 운전대를 잡은 낯선 길처럼 복잡해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나름의 질서와 흐름이 있다. 결국 이곳에서의 의료는 상황에 맞는 '적절한 문'을 두드리는 일이다.
가장 먼저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주치의다. 나의 건강 이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반자이자, 가장 적은 비용으로 나를 가장 잘 아는 이를 만나는 첫 번째 관문이다. 더 정밀한 진료가 필요할 때는 주치의의 '소견서(Referral)'라는 열쇠를 들고 전문의의 문을 두드리면 된다. 주치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문의를 만날 수 있는 보험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은 늘 정해진 길로만 흐르지 않는다.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거나, 이번처럼 골든타임을 다투는 긴급한 순간에는 어전트 케어가 구원 투수가 되어준다. 예약의 기다림과 응급실의 중압감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고마운 중간 지대인 셈이다. 그리고 정말 생명이 위태로운 깊은 밤이라면, 높은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최후의 보루인 ‘응급실(ER)’로 달려가야 한다. 응급실에서는 절대로 환자를 거부할 수 없으며, 위급한 순서에 따라 진료한다.
이국 땅에서의 삶이 늘 건강하기만을 바라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아픔은 피할 수 없다. 평온한 날에 미리 이 의료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둔다면, 언젠가 몸이 보내올 이상 신호 앞에서도 조금은 덜 당혹스럽게 그 길을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2026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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