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의 일이다.
젊었을 때 보험업으로 성공했다는 성당 교우 한 분이 내게 보험 일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결국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보험 대리인 자격을 취득했다.
그때는 아직 머리가 잘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생명보험과 건강보험, 두 가지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자격을 동시에 땄고, 함께 공부하던 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자격증을 손에 쥐고도 보험 영업의 세계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사람을 설득하고 숫자로 삶을 설명하는 일은 내 성격과 맞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며 그때 외웠던 내용은 대부분 사라졌다. 지금은 보험 중개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이 분야에 얼마나 무지한지 새삼 느낀다. 아마도 그 공부가 재미가 아니라 마지못해 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따라가지 않은 공부는 기억에도 오래 남지 않는다.
나는 보험 약관의 빽빽한 글자를 꼼꼼히 따지는 성격이 아니다. 자동차나 주택 보험을 고를 때도 조건보다 사람을 먼저 보았다. 믿을 만하다는 판단이 서면, 해마다 오르는 보험료에도 “올릴 만하니 올렸겠지” 하며 군말 없이 납부해 왔다. 나에게 보험은 계산의 결과라기보다 신뢰의 연장선이었다.
처음 자동차 보험을 맡긴 사람은 같은 직장에서 일하다 보험 에이전트가 된 후배였다. 그의 인품을 믿고 거의 20년 가까이 내 차와 집의 보험을 맡겼다. 그러던 어느 해, 보험료가 갑자기 40퍼센트나 올랐다. 이유를 묻자 그는 회사 정책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대답은 틀리지 않았지만 공허했다.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특정 회사에 소속된 에이전트의 선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결국 보험회사의 사람이었다.
그 후에는 같은 성당 교우인 브로커를 통해 보험을 들었다. 여러 회사의 조건을 비교해 주었고, 보험료는 낮아졌으며 보장은 좋아졌다. 시장 전체를 보여준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다시 한 번 사람을 믿고 관계를 이어 갔다.
하지만 시간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주었다. 10년이 넘자 관계는 익숙해졌고 긴장도 사라졌다. 올해 초 보험료가 거의 두 배로 오르자 이유를 물었는데, 돌아온 말은 “장기 고객이라 그나마 특별히 대접해드린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오랜 신뢰 위에 쌓아 온 관계치고는 너무 가벼운 말이었다.
결국 나는 새로운 브로커를 만났다. 그는 내 형편을 차분히 살폈고, 보험에 무지한 질문에도 서두르지 않고 설명해 주었다. 그가 건넨 것은 상품보다 안도감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마음이 편해졌다. 집과 차를 소유하는 한, 이 관계를 오래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에이전트와 브로커의 차이는 능력보다 시선의 문제에 가깝다. 에이전트는 자신이 속한 회사의 상품을 깊이 알지만, 그 시선은 늘 회사의 경계 안에 머문다. 반면 브로커는 먼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위에 선택지를 펼쳐 보인다. 삶이 단순할 때는 에이전트의 깊이가 편할지 모르지만, 삶이 복잡해질수록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해진다.
보험은 평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고를 당하면 보이지 않던 차이가 선명해진다. 그때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약관 속 숫자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그 사람이 과연 기꺼이 내 편에 서 줄 사람이었는가 하는 사실이다.
(2026년 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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