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눈은 공평하게 내리지만, 노인에게는 무게가 다르다

삼척감자 2026. 1. 31. 22:10

폭설이 내린 지 엿새가 지난 오늘 아침,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웹사이트를 둘러보았다. 게시판에는 여전히 눈을 치우지 못해 고생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글들이 가득했다. 제설 업체에 연락해도 함흥차사라는 사연부터, 약속 시간에서 몇 시간 지나 연락하며 애초에 합의된 요금에서 세 배나 더 요구했다는 하소연까지 분통 터지는 소식들이 이어졌다. 특히 병원 방문이나 식료품 구입조차 어려워 발이 묶인 분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웃도 업체도 모두제 코가 석 자이거나 일감이 밀려서 도움의 손길이 닿기엔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겨울이 오면 눈은 더 이상 아름다운 설경을 꾸미는 선물이 아니다. 도리어 근심과 걱정을 몰고 오는 불청객에 가깝다. 두 딸이 어렸을 적, 아이들은 창밖을 보며 설렘에 눈을 반짝이곤 했다. 휴교를 기대하며 세상이 얼마나 하얗게 변했는지 확인하는 아이들에게 눈은 마냥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당시 장사를 하던 내게 눈은 그저 시름의 대상이었다. 폭설 전후로 손님들의 발길이 끊겨 떨어질 매상을 걱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노년이 되어 마주하는 눈은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이제 눈은 낭만이 아니라, 차갑고 싸늘한 시선으로 경고를 보낸다. 단독 주택에 사는 노인에게 눈이 쌓이면, 집 앞마당과 진입로는 거대한 시험장이 된다. 삽질 몇 번에 숨이 가빠지고 허리에는 통증이 몰려오며,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심장은 비명 지르듯 빠르게 뛴다. 반쯤 치우다 남은 눈은 더 큰 위협이 된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빙판이 된 보도는 노인에게 낙상을 입히는 무서운 흉기로 변하기 때문이다. 외출길이 막히면 약국도, 병원도, 이웃과의 교류도 모두 단절되고 만다.

 

아파트나 콘도에 사는 노인은 조금 다른 겨울을 맞는다. 제설은 관리사무소의 몫이고 공동 진입로는 늘 확보되어 있다. 하지만 주차된 차 위와 그 주변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은 여전히 내 몫이다.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눈과 얼음은 여전히 위협적이며, 아무리 조심해도 위험은 보이지 않는 곳에 도사리고 있다. 단독 주택 거주자가 체력과 시간을 들여 직접 길을 내야 한다면, 아파트 거주자의 제설 작업은 그나마 수월한 편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많은 노인은 선뜻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비용 문제보다도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고집스러운 배려가 앞서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홀로 삽을 들고 밖으로 나선다. 눈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리지만, 그 무게까지 같지는 않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이고 누군가에게는 시험이지만, 노인에게는 기필코 견뎌내야 할 무거운 짐이다.

 

눈 치우기가 막막할 때 전해지는 이웃과 지역 사회의 온기는 큰 힘이 된다. 미국 곳곳에는 노인 가구의 진입로를 대신 치워주는 프로그램이 활발하다. 청소년과 성인 봉사자를 연결하는스노우 엔젤(Snow Angel)’, ‘스노우 버디(Snow Buddy)’ 같은 활동이 대표적이다. 일부 도시에서는 시 정부나 노인 센터가 60세 이상 노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주민을 위해 무료 제설 서비스를 운영하기도 한다.

 

눈 오는 날, 한 사람의 겨울을 조금 더 안전하게 만드는 일은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 노인이 혼자 삽을 들지 않아도 되는 날, 그 집 앞에는 누군가의 따뜻한 발자국이 남을 것이다. 하얀 눈 위에 찍힌 그 발자국은 작은 안전망이자 지역 사회의 연대를 보여주는 증거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하루하루 속에서 겨울은 그렇게 조금씩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결국 겨울의 무게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나눌 때 비로소 가벼워진다.

 

(2026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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