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무료 팩스 전송’이라는 문구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무료라는 말이 얼마나 가벼운지 알면서도, 급한 서류 하나 보내는 일쯤이야 괜찮겠거니 했다. 클릭을 하니 전송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막상 보내려니 1달러를 결제하란다. “인증용인가 보다.” 그 정도는 흔한 일이니, 별생각 없이 크레딧카드를 입력했다.
팩스는 보내졌고, 일은 끝난 듯했다. 그런데 며칠 뒤 카드 사용 내역을 보다가 낯선 숫자가 눈에 걸렸다. 35달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결제였다. 자세히 보니 그 ‘무료 팩스’ 업체 이름이었다. 순간 기분이 묘했다. 억울하다기보다는, 속이 허전한 느낌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카드회사에 dispute를 신청했다.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정상적인 거래라는 것이다. 내가 직접 카드 번호를 입력했고, 결제가 승인되었으니 문제없다는 논리였다. 말은 맞았다. 틀린 말은 없었다. 다만 그 말 속에는 ‘속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한 달쯤 지나 다시 카드 명세서를 보았을 때, 같은 금액이 또 찍혀 있었다. 또 35달러. 그제야 상황이 분명해졌다. 무료가 아니라, 거의 공짜인 척하는 정기 결제였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건만, 막상 그 상황에 놓이니 나 역시 그 말에 기대고 있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이번에는 방향을 바꿨다. 짧은 항의가 아니라, 그간의 경위를 차분히 적은 편지를 그 회사에 보냈다. 무료라는 말에 기대어 결제하게 된 과정, 명확한 고지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반복 청구로 느낀 당혹감까지. 그 편지의 사본을 카드회사에도 함께 보냈다. 그제야 상황이 달라졌다. 카드회사는 이전과 달리 이 사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내 입장을 대신 설명하며 대응하겠다고 했다.
내친 김에 그동안 두 번 청구된 금액에 대한 환불도 요청했다. 솔직히 말해 큰돈은 아니었다. 그냥 넘어가도 될 금액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이 정도쯤이야’라는 생각이 이런 상술을 살려 둔다는 걸 깨달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더 이상 내 카드로 결제를 요청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이미 인출된 70달러 전액을 환불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태도는 처음과 사뭇 달랐다.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강하게 나오던 회사도, 끝까지 따지고 드니 오히려 조심스러워졌다.
일이 정리되고 나서도 마음이 완전히 가볍지는 않았다. 나야 우여곡절 끝에 환불을 받았지만, 이런 과정을 알지 못하거나 귀찮아서 포기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다시 정리해 연방거래위원회, FTC에 보냈다. 누군가를 처벌해 달라는 마음보다는, 이런 속임수가 ‘별일 아닌 일’로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까웠다.
이 일을 겪고 나서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거의 공짜’라는 말에 넘어가지 말자, 속지 말자. 그리고 혹시라도 속았다는 생각이 들면, 금액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그냥 넘기지 말자. 요즘의 사기는 대놓고 훔치지 않는다. 친절하고, 합법의 외피를 두르고, 아주 작은 글씨 속에 숨어 있다. 그래서 더 교묘하다.
세상에는 여전히 무료인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가장 크게 외치는 곳일수록, 가장 비싼 값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일은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사기성 상술을 펴는 회사라도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의외로 무서워한다는 교훈도 함께 남겼다. 작은 금액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 덕분에 나는 ‘무료’라는 말의 진짜 값을 배웠다.
(2026년 1월 28일)
'미국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멈춰 선 아침이 건넨 말 (1) | 2026.02.02 |
|---|---|
| 눈은 공평하게 내리지만, 노인에게는 무게가 다르다 (0) | 2026.01.31 |
| 보험의 숫자에 가려진 사람의 얼굴 (0) | 2026.01.29 |
| 겨울 일기예보를 듣는 법 (1) | 2026.01.24 |
| 당황하지 않고 알맞은 문을 두드리기 (1) | 2026.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