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생활

이별에도 저마다의 언어가 있다

삼척감자 2026. 2. 9. 22:14

예배당이나 성당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나는 이를 배웅할 때마다, 나는 이별에도 저마다의 언어가 있음을 새삼 실감한다. 오랜 세월 가톨릭의 전례에 익숙해 진 내게, 어쩌다 마주하는 예배당의 장례식은 여전히 조금은 낯선 풍경으로 다가오곤 한다.

 

성당의 이별은 정해진 길을 걷듯 분명하다. 고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뷰잉(Viewing)'에서 시작해, 제대 앞에 닫힌 관을 두고 올리는 장례 미사, 그리고 장지에서의 하관예절까지. 그중에서도 뷰잉은 신앙의 언어보다 인간의 슬픔이 앞서는 시간이다.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연도)를 바치고 추도사를 읽으며 고인의 삶을 반추하는 동안, 우리는 신앙인 이전에 나약한 인간의 얼굴로 선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속절없이 작아진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 시간이다.

 

오래전, 가까운 지인의 모친상으로 처음 참석했던 '천국 환송 예배'는 내게 작지 않은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당연히 슬픈 분위기에서 예배가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건만, 예배당을 채운 것은 뜻밖에도 확신에 찬 기쁨이었다. 눈물 대신 감격 어린 축하가 오갔고, 침묵 대신 힘 있는 고백이 울려 퍼졌다. 장례식이라기보다 본향으로 돌아가는 이를 배웅하는 성대한 잔치 같아, 나는 한동안 그 생경한 공기 속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당혹감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죽음을 해석하는 언어의 차이였다. 그곳에서 죽음은 상실이 아닌 완성이었고, 삶은 잠시 머물다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슬픔은 부정되지 않았으나 예배의 중심에 놓이지는 않았다. 밝은 찬송은 죽음을 승리의 서사로 바꾸어 놓았고, 애도는 공동체의 굳건한 신앙 고백 아래 미뤄지고 있는 듯했다.

 

가톨릭에서 죽음을 대하는 방식에 익숙한 내게, 그 밝음은 슬픔이 채 자리 잡기도 전에 선언된 성급한 기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것은 신앙의 깊고 얕음의 문제가 아니라, 이별의 무게를 견뎌내는 저마다의 방식이었음을. 그들은 슬픔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예배의 제단 위에 올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어제, 가까이 지내던 어느 목사님의 장례 예배에 다녀왔다. 그런데 그곳의 풍경은 예전에 참석한 천국 환송 예배의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예배당 앞쪽에는 고인의 관이 열린 채 놓여 있었고, 의식은 가족들을 중심으로 차분하고 조용하게 흘러갔다. 가족들은 차례로 나와 고인을 추모하며 이별의 아픔을 숨기지 않았고, 조문객들은 줄을 지어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성당의 뷰잉과 닮아 있는 그 모습에 가톨릭 신자인 나도 비로소 낯선 경계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추도사가 이어지고 기도가 길어지며 시간은 더디게 흘렀지만, 신앙의 언어와 인간의 감정은 무리 없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별을 대하는 형식은 달라도 결국 남는 것은 떠난 이를 향한 지극한 사랑이며, 남은 이들이 서로의 슬픔을 조심스레 보듬는 마음이라는 것을 느꼈다.

 

개신교 안에서도 종파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이별의 얼굴이 이토록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저마다의 언어로 빚어낸 이별일지라도, 그 본질은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임을 말이다.

 

(2026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