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신부님께 조심스러운 건의를 드린 적이 있다. 신부님의 강론이 알차고 훌륭하지만, 조금만 유머를 섞어보시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딱딱하고 긴 말씀보다는 웃음이 섞인 이야기가 신자들의 집중력을 높이고 마음을 더 편안하게 열어줄 것이라는, 나름대로는 ‘선의’가 담긴 조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신부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유머를 넣으면 말이죠, 미사가 끝나고 나갈 때 신자들은 복음은 다 잊어버리고 제가 했던 웃긴 이야기만 기억합니다.” 그 완강한 거절 앞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정말 그럴까? 메시지와 재미는 결코 함께 갈 수 없는 평행선인 걸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뀐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아주 오래전 읽었던 제임스 A. 미치너(‘남태평양’을 쓴 작가)의 소설 ‘소설(The Novel)’을 문득 떠올렸을 때다. 이 작품은 한 편의 문학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작가, 편집자, 에이전트, 비평가라는 네 가지 시선을 통해 문학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헤친 수작이다. 하지만 정작 내 기억의 창고를 뒤져보았을 때, ‘소설’이 말하고자 했던 그 ‘문학의 본질’은 가뭇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주 사소하고 자극적인 두 가지 장면뿐이었다. 하나는 옷에 지퍼를 다는 것이 교리에 어긋나는지를 두고 다투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논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여성 인물이 입고 등장한 티셔츠의 도발적인 문구였다.
“The objects under the shirt may be bigger than they appear.” (셔츠 아래의 물체는 겉보기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자동차 사이드미러에 찍힌 경고문인“Objects in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을 패러디한 이 농담은 강렬했다. 비평가들은 이 문장이 작가의 가냘픈 외양 너머에 숨겨진 거대한 지성과 내면의 우주를 상징한다고 거창하게 해설했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그 화려한 은유가 아니라 그저 ‘도발적인 티셔츠’라는 감각적 잔상뿐이었다. 작가가 쏟아 부었을 고뇌와 지혜는 증발하고, 그가 곁들인 재치 있는 장치만이 박제되어 남은 셈이다.
이제야 신부님의 말씀이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사람의 기억은 이토록 영악하고도 게을러서, 본질을 탐구하기보다는 자극적인 주변부에 머무르길 즐긴다. 웃음이 강렬할수록, 농담이 화려할수록 우리가 정작 붙잡아야 할 메시지의 중심은 뒤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강론대 위에서 시종일관 진지함을 고수했던 신부님의 고집은, 어쩌면 당신의 존재마저 지워내며 오직 ‘그분의 말씀’만이 신자들의 가슴에 온전히 닿기를 바랐던 절실한 뒷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독서의 기억이 증명하듯, 본질은 늘 농담이 사라진 뒤에야 겨우 제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 ‘소설’이라는 책을 다시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알아보니 그처럼 흥미로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독자들에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는지 오래전에 절판되었다고 한다. 영문판 ‘Novel’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두꺼운 책을 끝까지 읽어 낼 자신은 선뜻 서지 않는다.
(2026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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