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호기심과 사생활 존중

삼척감자 2022. 9. 8. 00:31

집 둘레를 도는 산책길에서 거의 언제나 스콧(Scott)이라는 백인 남자를 만난다. 다리 하나를 잃어서 의족을 낀 나는 목발 두 개를 짚고 열심히 걷는데, 두 다리 멀쩡한 그는 늘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전화기를 들여다본다. 이른 아침에는 어쩌다 벤치에 커피잔이 보이기도 한다.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가 아니면 날씨 얘기를 나누지만, 가끔 땡볕을 쬐며 걷는 나에게 더운 날씨에 걷고 나서 꼭 물 한 잔 마셔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맙소라고 대답하지만 때로는 물 말고 맥주를 마실까 합니다.”라고 하면 그는 정색하며 “You, bad boy”라고 말한다. 참 웃음이 박한 영감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일 년이 좀 더 된 것 같다. 어느 날 낯선 백인 남자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기에 이사 왔느냐고 물었더니 누님인 리타(Rita) 집에서 지낸다고 했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남자가 그 나이에 여든이 넘어서 혼자 사는 누님집에 얹혀사는 까닭이 궁금했지만, 사생활을 존중하는 미국에서는 그런 걸 물어 볼 수는 없었다. 그냥 이혼했거나 결혼 못 한 노인이 비슷한 처지의 누님집에서 신세를 지거니 짐작했다.

 

매일 여러 차례 그를 만나며 날씨 얘기만 하기도 멋쩍어서 간간이 술 얘기도 하고, 야구 얘기, 바다 얘기를 나누다가 간간이 묻어나오는 말을 통해 산티아고에 그의 아들이 있고, 그의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더 많고, 누님 리타는 여든 조금 넘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런 정도다.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왜 그 나이에 누님과 함께 지내는지, 왜 운동도 하지 않고 늘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하는지이런 사생활에 속하는 걸 물어보는 건 실례가 된다.

 

미국에서는 직원을 채용하기 위해 면접을 할 때도 나이, 신장, 체중 같은 신상에 관한 걸 물어보았다가는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 남편의 직업이 무엇인지, 자녀들의 나이는 몇 살인지, 이런 가족에 관한 걸 미주알고주알 물어보는 것도 삼가야 한다. 미국에 오래 살며 사생활은 존중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몸에 배어서 그런지 성당에서 늘 만나는 사람들과도 개인과 가족의 신상에 관한 얘기는 별로 나누지 않는 편이다. 성당에서 주일마다 수십 년을 만난 사람이라도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 잘 모른다. 그런 걸 알아보았자 도움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한국에서의 학벌이 미국에서 먹고사는데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온 지 몇 달 되지 않았다는 어떤 사람과 성당에서 점심을 함께하며 나이가 어떻게 되었느냐?”,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 “자녀는 몇을 두었으며 그들은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좀 불쾌했다. 겨우 두어 번 보고 이름 정도만 아는 사이에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해 주기는 했다. 만약에 내가 그보다 나이가 한참 아래라면 얕잡아 보았을지도 모르고, 속 썩이는 자녀를 둔 사람에게는 그런 질문이 몹시 난처했을 수도 있었겠다. 다행히 나는 그와 나이가 비슷하고, 그리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 대학을 졸업했고, 자랑스러운 딸들을 두었지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호구조사를 하겠다고 나서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신상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특히 그 질문이 무례하다고 생각되면, 영어로는 “It’s none of your business(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또는 “Mind your own business(당신 일에나 신경 쓰세요).”라고 대답하면 된다고 배웠지만, 사실 이 표현은 좀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으니 아주 가까운 친구에게나 써야지 아무에게나 쓸 건 아니다. 이럴 때는 “I’d rather not say(별로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표현이 무난할 거 같다. 그런데 미국인들에게서 지나치게 개인적인 질문을 받은 적이 없어서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고민해 본 적도 없다. 그들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하려는 마음이 앞서는 것 같다.

 

(2020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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