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우물에서 숭늉 찾기

삼척감자 2024. 5. 7. 06:08
우물에서 숭늉을 찾았다는 전설 속 인물이 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맥주를 원샷으로 마시기 시작한 시조가 내가 아닐까 싶다. 물론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직장에 다닐 때 계산기를 찾다가 눈에 띄지 않자, 얼결에 탁상전화기의 자판을 두드린 게 다른 직원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상사의 지시는 물론 벼락같이 해치웠지만, 칭찬은 별로 듣지 못 했다. 오히려 경솔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나 모르겠다. 나는 일을 잘 했지만(그냥 웃으세요) 상관이란 워낙 칭찬에 인색한 인종이니까.
부하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한 다음 바로 다 끝냈느냐고 묻는 일이 자주 있어서 사람을 들볶는다고 원성을 듣기도 했다. 부하라는 인간들은 왜 하나 같이 느려터졌고, 무능하냐고 푸념했다.
이게 모두 내 지랄같이 급한 성질 탓이다.
사흘 전 한밤중에 세면기 아래쪽 배수 파이프에서 물이 새는 걸 발견했다. 바로 연장을 찾아서 해결해 보려다가 오래되어 삭은 파이프를 깨뜨렸다. 괜스레 분통이 터져서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다가 아침 일곱 시가 넘자마자 한동네에 사는 포르투갈 출신 핸디맨(수리공) 빌(Bill)에게 전화해서 당장 와달라고 했더니 여덟 시에 나타났다. 세면기 아래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오늘은 바빠서 여섯 시 이후에나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여섯 시 반쯤 집에 온 그가 시원시원하게 부품을 교환하고 수리비도 싸게 받은 다음 말했다.
“제발 아침 여덟 시 전에 전화하지 마라. 나도 잠 좀 자자.” 그 친구 내가 누군지 잘 몰랐나 보다. 속으로 한마디 했다. “나 이래 봬도 강원도 삼척에서 제일 성질 급한 사람이야.”
그래도 신혼여행가서 왜 아이가 나오지 않느냐고 불평하지는 않았으니 나는 그래도 성격이 느긋한 편이다.
성질 급한 내가 좀 느긋하게 지내라고, 하느님은 교통사고를 통해 다리 하나를 절단하게 하셔서 클러치 두 개를 짚고 느릿느릿 걷게 하시고, 성대를 조금 상하게 하셔서 어눌하게 말하도록 하셨으니 이건 주님의 은총이라고까지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주님의 배려라는 정도로 말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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