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중이염에 걸렸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후유증으로 평생 어려움을 겪었다. 고막이 진동하지 않는 오른쪽 귀로는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고, 청력이 30% 정도 모자라는 오른쪽 귀에 의존해서 지내다 보니 문제가 적지 않았다.
1. 목소리가 작은 교사의 강의를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 시험 성적은 언제나 빵점이었다. 그래도 홀로 공부하는 능력과 집중력이 탁월했던지 어릴 적 학교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아마도 집중 능력은 잘 들리지 않는 귀 덕분이었을 지도 모른다.
2. 목소리가 작은 직장 상사에게는 능력이 시원치 않고, 좀 얼뜬 부하직원으로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직장에서는 목소리 큰 직원이 대다수였다.
3.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도 알아들은 체하다가 엉뚱한 대답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도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많아서 그걸 유머 감각으로 너그럽게 봐주는 사람이 많았다.
4. 말을 길게 해서 장시간 집중하게 만드는 사람이나 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오른쪽에서 말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짜증스럽다. 하지만 대개 목소리가 큰 경상도 출신들과의 대화에는 별문제가 없다.
귀만 정상이었어도 공부도 더 잘했을 테고, 사회생활도 원만했을 거로 생각하면서 인생에서 별로 이룬 것 없이 살아오다가 이 나이가 되어 뒤늦게 귀 탓이나 하는 내가 참 딱하다. 귀가 들리지 않는데도 불후의 명곡들을 남긴 악성 베토벤을 생각하면 나의 핑계는 공허할 뿐이다.
오래전, 목소리가 유달리 작은 상관을 만나니 잘 듣지 못하므로 생기는 문제가 자꾸만 불거졌다. 지시 내용을 잘 듣지 못하니 엉뚱하게 일 처리하기도 했고, 회의 때도 제대로 듣지 못해서 버벅거리다가 지적받는 일이 잦아서 이비인후과 의사의 처방을 받아서 거금 들여서 보청기를 주문했다. 주파수 대역별로 정밀하게 조정했기에 난청으로 인한 문제는 말끔히 해결될 거라는 전문가의 장담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소리가 잘 들리기는 했지만,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고, 소리가 울려서 정신이 없었다. 보청기를 낀 후로는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이 견딜 수 없었고, 갖은 소리에 반응하려니 긴장의 연속이었고, 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 곳이었다니! 그래도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산 보청기를 버릴 수도 없어서 석 달 정도 보청기에 적응해 보려고 애쓰다가 결국 시끄러운 세상에서 살기를 포기해 버렸다.
나이가 드니 청력이 더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외손들과의 대화에 문제가 있어 보이니 보청기를 사용해 보는 게 좋겠다는 큰딸의 권유에 따라 이번에는 값이 싼 음성증폭기를 사서 써 보았다. 성능은 오래전에 사용해 본 보청기와 별로 차이가 없었으나 역시 시끄러운 게 문제였다. 외손들 만난 일도 별로 없고, 백수 처지라 사람 만날 일도 별로 없어서 음성증폭기는 주일에 성당 갈 때만 끼고 항상 충전기 안에서 쉬고 있다.
이번에도 느낀 건 세상은 시끄러운 세상과 조용한 세상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걸리버가 여행한 이상한 나라 못지않게 음성증폭기를 낄 때마다 경험하는 시끄러운 세상도 적응이 어렵다.
만약 내가 시끄러운 세상에서 살았더라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잘 들리는 귀 덕분에 공부도 더 잘할 수 있고, 내성적인 내 성격이 활달해져서 대인관계도 원만해서 사회생활도 성공적으로 해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을 두 번 살 수는 없는 거니까.
(2024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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