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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대하여

삼척감자 2025. 4. 28. 05:44

오래전, 맹인 가수 이용복이 불러 인기를 얻었던 번안가요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원제: 1943 3 4)가 문득 떠올랐다. 구글에서 찾아보니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바람이 휘몰던 어느 날 밤 그 어느 날 밤에 /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 /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는 구절은 잊히지 않는다. 그 노래가 주는 여운이 꽤 오래 가는 것 같다.

 

얼마 전, 중고책을 거래하는 온라인 서점을 통해 『The Greatest Gift』라는 소설을 구해 읽다가, 내친김에 한국어로 번역해 보았다. 그러다 느닷없이 그 노래가 떠오른 것은, 소설이나 그 노래 가사 모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내가 해마다 연말이면 거의 잊지 않고 찾아보는 영화 『It’s a Wonderful Life』의 원전이다.

 

영화와 소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절망에 빠져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세상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하게 되는데, 이때 천사 혹은 신비한 낯선 존재가 등장해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 경험을 통해 주인공은 자신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깨닫고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는다. 비교적 단순한 내용이지만, 읽거나 보고 나면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두 작품은 등장인물도 많이 다르고 이야기 전개 방식에도 차이가 적지 않지만, 둘 중 하나만 본다면 영화를 감상하기를 권한다.

 

인간은 보통 극심한 고통이나 절망을 겪을 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다.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지독한 배신을 경험할 때.

극심한 고통: 병이나 사고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지속될 때.

절대적 무력감: 아무리 애써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모든 노력이 허사처럼 느껴질 때.

외로움과 소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자책과 후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 자신조차 용서할 수 없을 때.

존재 이유를 잃었을 때: 삶의 의미나 목표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껴질 때.

 

살아오면서 이런 상황을 한 번도 겪지 않았거나, 그런 상황에서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면, 아마 무척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생각 없이 살아왔거나. 나도 이런 생각을 여러 차례 해 본 적이 있다. 나처럼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절단당하고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머리가 좀 모자라거나 매우 낙관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지 않은 세상은 어떨까? 그런 가상의 세상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 세상을 보여 달라고 부탁할 만큼 잘 아는 천사도 없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없더라도 이 세상은 알아서 잘 굴러갈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믿어왔기에 이제는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다.

 

나는 그 영화의 도입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을 걱정하는 수많은 이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자살 직전의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천사가 급히 파견되는 장면에서는 기도의 힘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천사와 천사장의 대화에서 '병보다 절망이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언급한 부분은 깊이 새겨야 할 말이라 생각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발행된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절망은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죽지 못하는 상태다"라고 했다. 이 책은 절망을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절망을 '자신이 되기를 거부하는 상태'라고 정의하고, 이를 죽음보다 더 깊은 병으로 설명한다. 고등학생 때, 대학생이던 친척 형이 과시용으로 끼고 다니던 책을 빌려 본 터라, 사실 기억나는 내용은 별로 없다. 이참에 다시 구해 읽어 볼 생각이다. , 읽을 책은 많으나, 시간은 모자라구나.

 

 (2025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