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공동체

어른이 주면 그냥 받는 거야

삼척감자 2022. 9. 5. 02:11

몇 년 동안 양로원에 계시던 우리 성당의 세레나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격리 때문에 직계 가족 외에는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다니 참 살다 보니 참 별일을 다 겪는구나 싶었다.

 

몇 년 전에 뵈었을 때도 할머니는 아흔이 가까운 연세에도 참 고우셨다. 허리가 조금 굽었지만, 얼굴 모습은 30년 전에 처음 뵈었을 때나 별 차이가 없었다.할머니를 볼 때마다 젊었을 때는 대단한 미인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오래전 설날에 성당에서 나를 보시더니,

 “이거 받아.” 하고 뭘 손에 쥐여 주시는데 펴 보니 시퍼런 배추 이파리 한 장이었다.

 “뭘 이런 걸 다 주십니까? 그냥 두세요.”하고 $10짜리를 돌려 드리니까,

“세뱃돈이야. , 적어서 그래?

“세배도 안 했는데 무슨…”

“어른이 주면 그냥 받는 거야.

나이 예순이 다 되어서 여든이 다된 분에게 젊은이 취급을 받으며 세뱃돈을 받으니 기분은 좋았다.

 

그 이후부터는 매년 두어 차례씩 명절이나 대축일에 초콜릿을 주셨다. 몇 년 동안 계속해서 길쭉한 열두 개들이 초콜릿을 주시기에 염치없이 받아먹다가 언젠가 부활절에 “저 단 것을 별로 안 좋아하니 이제 초콜릿은 그만 주시지요.”라고 했다.

 

그런데 그다음 해 정초에 친교실에서 하얀 종이에 싼 작은 꾸러미를 주시기에 받았더니, “내 얘기 좀 들어 볼 테야.”라고 하셨다. 선물도 받았겠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할머니의 사연을 들었다.

“자네, 정치인 S 씨를 알아?” 알다마다, 건국 초기에 대통령 출마까지 한 거물급인데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사연은 30분 가까이 길게 길게 이어졌는데 할머니의 화술이 좋았고 줄거리가 확실히 잡혀서 지루한 줄 모르고 들었다.

부모의 완강한 만류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총독부 타자수로 취직한 얘기,

총독부 고위직인 일본인의 귀여움을 받은 얘기,

그 옛날에 자전거를 탄 신여성이었다는 얘기,

거물 정치인의 동생과 이런저런 사연이 있었다는 얘기, 사실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한데 내가 딴생각을 하다가 놓쳐 버렸다. 재차 확인하면 야단맞을까 봐 대강 알아들은 척했다.

더 오래 계속될 수 있었는데 수녀님이 할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바람에 중단되었고 나는 그 틈을 타서 내뺐다.

 

얘기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사랑과 결혼 이야기, 남편을 일찍 잃고 고생한 얘기, 자식 키우느라 고생한 얘기, 신앙 이야기…등등이 끝없이 이어졌을 텐데 나도 몇 시간 동안 그분의 얘기를 들을 수도 없었겠지만, 아무튼 조금 아쉬웠다.

 

집으로 오는 도중에서 차 안에서 할머니에게서 받은 종이 꾸러미를 풀어 보았더니 늘 주시던 길쭉한 초콜릿 세 개가 얌전히 들어 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가끔 말한다.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면 소설 몇 권은 나오고 남는다고. 그 할머니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이야기를 품고 사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이 들어서 얘기 들어 줄 상대가 있으면 살아온 이야기를 끝없이 풀어 놓는 것일 거다.

 

나는 할머니께서 100살까진 사셨으면 했다. 그때쯤이면 물가도 많이 오를 테니 여든이 된 나에게 $10짜리 말고 $20짜리를 세뱃돈으로 주시며, “어른이 주면 그냥 받는 거야.”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았을 텐데.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묵시 21, 4)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할머니께서 이 세상에서 겪은 괴로움일랑 모두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기원한다.

 

(2020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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