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나이 들면 모두 환자라던데

삼척감자 2023. 4. 6. 21:59

내가 L 목사를 처음 만난 건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 온 직후였으니 4년 전이었다. 어느 날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있는데 나보다 나이 조금 더 들어 보이고 점잖게 생긴 분이 혹시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본인이 목사라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체육관에 나오는 다른 한국인에게서 그분이 근처에 있는 한국 교회에서 사목하다가 은퇴한 원로 목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 가끔 점심도 함께하고, 집에서 만든 음식도 나눠 먹고, 그분의 안내로 영어 공부도 함께 하며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서로 다른 종교를 믿어도 그게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괜히 목사티를 내며 성경 말씀을 가르치려 든다든가, 가톨릭을 은근히 비난하며 개종을 권한다든가 하는 일 없이 오로지 일상적 얘기만 나누니 신앙이 다른 게 문제가 되려야 될 수가 없었다. 배가 심하게 나오고, 편안하게 생긴 모습이 은퇴 목사라기보다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을 풍기지만, 식사 전에 바치는 기도는 짧지만, 늘 은혜롭다. 그러니 그분 부부와 만나면 항상 편안했다. 단지,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분이라 안줏거리로도 손색없는 음식을 함께 나눌 때는 나 혼자 술 생각에 몰래 입맛을 다시기가 좀 힘들지만, 목사 앞에서 술 얘기는 금물이라 참는 수밖에 없었다.

 

약간 비만한 것 말고는 건강에 별 이상이 없어 보이고 운동도 열심히 하던 그분이 몇 달 전에   수술받았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얼마 후에 만나 보니 배도 조금 들어가고 안색도 좋아 보여서 별일 아니려니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암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며칠 전에 체육관에서 오랜만에 그분을 만나자 버릇처럼 불룩 나온 배부터 쳐다보았다. 유난히 불룩한 배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이고, 군것질과 탄산수를 좀 줄이시지 않고서그분 댁을 방문했을 때 식탁 옆에 쌓인 갖가지 과자 봉지와 탄산수가 생각이 나서 그랬지만, 점잖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꺼내는 건 실례니까 그냥 건강은 좀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며칠 전 검진을 받았더니 암세포가 전이되어 조만간 항암치료를 받는데 의사가 이번 항암 치료는 고통스러울 테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하더란다.

 

걱정되겠다는 내 말에 그분은 내 나이 일흔여덟이니 살 만큼 살았는데, 무슨 미련이 있겠어요. 그저 주님 뜻에 맡겨야지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에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름을 느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두 아들이 항암 치료받기 전에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권해서 다음 주 초에 멀리 타 주로 떠날 예정이라기에, “여행 잘 다녀오시고 힘든 치료를 잘 이겨내시라고 인사하며 헤어지면서도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분 뒤에는 든든한 하느님이 계시고, 신앙심으로 능히 어려움을 극복해 낼 거라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나도 나이 들어가니 친구나 주위 어르신들이 병으로 고통받거나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종종 듣게 된다. 교통사고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 보니 건강하게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느끼게 되었다. 병이나 사고로 겪는 고통 앞에서는 누구나 동등하고 주님의 존재를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 일을 겪으면 우리 자신이 보잘것없어서 인간은 가족이나 이웃에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나이 들면 우리는 모두 환자이거나 잠재적인 환자일 수밖에 없다고 하니 주위 사람의 고통이 남의 일이 아니라 생각된다. 

 

목사님, 즐거운 여행 되길 빕니다. 그리고 항암 치료 잘 받고서 완치되었다는 기쁜 소식 듣게 되면 제가 거창하게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그런 즐거운 자리에 술이 빠질 수는 없겠지요? 물론 저 혼자서 마시고 목사님은 술 구경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좋은 날에 까짓 한잔해 보세요. 그 참에 아예 술을 배우시던가.

 

(202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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