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글쓰기와 비빔밥 만들기

삼척감자 2022. 9. 3. 03:51

6월 말의 어느 날 아침에 블로그에 ‘Food & Wine’이라는 잡지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해 올리면서 보니 그 글이 딱 1,000번째 게시 글이었다. 그 글의 제목은 비빔밥의 기원이었다.

 

내 블로그는 2008 11월 말, 한국 방문에서 돌아와 모국에 있는 가족과 소통하려고 만든 건데 정작 가족은 전혀 방문하지 않고 낯선 이들이 부지런히 들러서 댓글도 달아주며 관심을 표하는 게 재미있어서 꾸준히 글을 올린 지 13년 반이 지나 그 숫자가 1,000개나 되었으니 티끌 모아 태산은 아닐지라도 꾸준히 글을 쓰다 보니 세월이 흐르며 이렇게 적지 않은 글이 모이게 되었다. 이미자 선생은 1,000곡이 넘는 가요를 불렀고, 축구 황제 펠레는 1,000개가 넘는 골을 넣었지만, 나는 1,000개 넘는 잡문을 썼노라고 아내에게 몇 번 뻐겼더니 좀 지겨워하는 눈치다. 

 

글쓰기와는 거리가 먼 공학도가 적지 않은 글을 쓰게 된 건 2005년에 일어난 교통사고가 계기가 되었다. 다리 하나를 절단하고 장애인이 되고 나서 의족을 끼고 목발 두 개를 짚고 일상에 적응하기 위해 재활원에 다니며 훈련받을 때였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를 위해 심리 상담을 받았는데, 담당자인 Dr. Kaplan이 후유증 치료에 크게 도움이 될 거라며 글쓰기를 간곡히 권했다.

무슨 내용이든 좋으니 글을 써보세요. 그게 사고 후유증 치유에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살아나 보니 죽음이란 건 언제 찾아올지 모르고, 내 옆에 아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살아온 얘기를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에게 남겨 두고 싶기도 했고, 심리 상담자가 치유에 도움이 된다고 했으니 글이란 걸 써 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우선 사고 경위와 사고를 당한 후의 심경 등을 써서 고등학교 동문 카페에 올려보니 반응이 썩 좋았고 친구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고국 방문을 마치고 미국에 다시 돌아와서는 본격적인 글쓰기가 시작되어 어릴 적 이야기, 사고 후유증을 극복한 이야기, 예전 직장 이야기, 독후감, 영화 감상 소감, 기행문, 신앙생활 등 다양한 주제로 많은 글을 써서 성당 웹사이트와 개인 블로그에도 올렸다. 변변치 않은 글이지만, 읽는 이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어서 열심히 써서 올렸다. 나중에는 몇 권의 성인전이나 가이드포스트 등의 신앙 서적에 게재된 글도 열심히 번역해서 올렸다.

 

이런 글들을 모아 몇 권의 수필집으로 묶어서 가족과 성당 교우들에게 무상으로 주다 보니 책 만들기가 재미있어져서 번역문도 몇 권 책으로 묶었고, 두어 개 단체의 부탁에 따라 그들이 쓸 책(악보집, 교재 등)을 만들어 주기도 했는데 그렇게 만든 책이 모두 십여 권이 된다. 책 만들기로 돈 한 푼 벌어보지는 못 했지만, 두 딸네 집 서가에 내가 직접 쓴 글을 모은 책 여섯 권이 꽂혀 있는 걸 보면 참 흐뭇하다.

 

블로그에 1,000번째로 올린 글인 비빔밥의 기원이라는 번역문을 다시 읽어보니 글쓰기와 비빔밥 만들기가 비슷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 ‘어떤 비빔밥을 만들 것인가?’- ‘어떤 내용의 글을 쓸 것인가?’

2. ‘재료 모으기’-‘글쓰기에 필요한 정보 수집

3. ‘각 재료의 양과 조리 시간 및 조리 순서 조절’-‘각 단락의 내용에 따라 문단의 길이와 배치 순서 결정

4. ‘재료를 버무리고 마지막으로 고추장을 넣고 참기름을 뿌리고 섞는다.’ –전체적인 내용을 아울러서 결론을 내린다.

 

오래전에 쓴 글과 최근에 쓴 글을 비교하면 맞춤법의 오류는 눈에 띄게 줄었고, 짜임새는 좋아졌으나, 글솜씨는 제자리걸음이다. 글을 많이 쓴다고 해도 문장력은 크게 늘지 않는 것 같다. 비슷한 내용의 글이 여러 개 눈에 띄어 요즘은 글쓰기를 대폭 줄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내용을 중언부언 늘어놓는 건 아닌가 싶어서다. 나이 들어 집과 성당과 체육관으로 생활 반경이 줄어들고 새로운 체험을 할 일도 별로 없으니 내 글쓰기도 어쩔 수 없이 줄어든다.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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