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에서 자주 만나는 프랭크 할아버지는 지팡이 한 개를 짚고 느릿느릿 걷는 모습으로 보아 8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만날 때마다 나는 그를 그냥 ‘프랭크’라고 부르고 그는 나를 보면 ‘Hello, Buddy(친구)’라 부르며(내 이름을 잊은 것 같다) 인사한다.낯 익은 미국인과 인사할 때는 특별한 경칭 없이 대개 이름을 부른다. 그들은 나를 그냥 내 미국식 이름인 ‘Steve’라고 부르고 친숙하지 않은 이가 격식을 차린다며 ‘Mr. Kim’이라고 부를 때도 있지만, 그럴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화할 때 상대방의 나이에 따라 표현을 조금씩 달리하는 우리와는 달리 다른 사람의 나이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존댓말이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미국인들의 인간 관계는 우리보다는 편하고 유연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부모와 자식간이나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간에도 서슴없이 할 말 다 하는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부러울 때도 있다.
영어에서 친구(friend)라면 친밀감이나 동류의식에 따른 정의이지 나이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래서 나이 차가 제법 나는 사람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나이가 비슷하지 않다면, 친구라고 부르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런데 “나이가 자기보다 곱절이 되면 아버지처럼 대하고, 10살 이상 많으면 형으로 대하며, 5살 이상 많으면 어느 정도 공경하는 게 좋다.”라는 율곡의 격몽요결에 나오는 글을 보면 조선 시대에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1년 혹은 한 달 단위로 선배와 고참을 가르는 문화는 아니었다고 하겠다. 조선 시대에 최고의 우정을 과시한 오성과 한음의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이었다고 하니 요즘 한국에서처럼 나이로 서열을 정하는 문화에서는 그런 우정은 상상하기 어렵다. 언제부터 나이가 계급 비슷하게 되었나?
영국의 국영 방송인 BBC에서는 한국인이 사용하는 꼰대(kkondae)라는 단어에 대하여 “잘난 체하고, 독선적이며, 고집이 센 나이 든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바야흐로 한국식 꼰대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것 같다. Wikipedia에서는 ‘이 단어는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든 사람들을 가리켰으나 최근에는 구태의연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직장 상사나 선배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을 보면 한국보다는 덜 하겠지만, 나이를 앞세워 꼰대질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저기에 잠복해 있는 꼰대들도 촌놈은 나이가 벼슬이라며 미국에서도 그런 촌티를 벗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미국인들은 나이에 따른 서열 문화가 없고, 존댓말을 쓰지 않아서인지 꼰대질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꼰대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럼 나는 꼰대일까? 나이가 나보다 한참 아래라는 이유로 상대에게 반말하지 않고, 처음 소개받은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아래라며, “말씀 놓으시지요”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다며 손사래 친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렇게 살아온 내가 절대로 꼰대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에 ‘꼰대 성향 검사(KKDTI)’라는 테스트를 받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 테스트에서 정의하는 꼰대는 성향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하되, 성향 별로 1등급(꼰대 기질이 가장 강함)에서 5등급으로 구분하는데, 나는 해보나 마나 5등급일 거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검사 결과는 뜻밖에도 3등급이었으니 나도 보통 정도의 꼰대 기질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내 주제도 모르고 착각하며 살았던 셈이다.
참 별의별 테스트도 있다고 생각하며 해설과 꼰대에서 탈출하기 위한 해결책을 읽어보니 사주 풀이보다 더 정확한 것 같았다. 그 중 극히 일부 내용만 인용해 본다.
특징: “내 안에 꼰대의 모습이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이 꼰대임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자신이 꼰대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해결책: “상대방이 당신의 취향을 좋아할 것이라 착각하지 말 것이며, 상대에게 당신과 같은 기준을 강요하거나 기대하지 말라”
이제부터라도 조심, 또 조심해서 젊은이들에게 꼰대 소리 듣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
(2021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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