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교수를 언급한 페이스북에 올린 내 글에 어떤 분이 댓글을 올리며 김교수가 강의하는 최근 사진을 올렸다. 그 사진을 보니 104세인 현재의 모습이 57년 전 내가 대학교 1학년 학생일 때 철학개론을 강의할 당시 47세였던 내 기억 속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놀랐다. 반년 동안 그분에게서 강의를 들으며 수많은 철학자의 이름과 철학 이론을 들었건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건 제논이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와 그가 제기한 화살의 역설뿐이다.
구글을 통해 내 기억을 보완해 보면 그날 들은 ‘화살의 역설’은 다음과 같다.
‘화살이 날아가고 있다고 가정할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살은 어느 점을 지날 것이다. 한순간 동안이라면 화살은 어떤 한 점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그다음 순간에도 화살은 어느 점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화살은 항상 머물러 있으므로 사실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이 역설을 소개하며 김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 역설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는데, 다들 ‘말도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이어서 김 교수는 이 역설이 그릇됨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지만, 아무도 반박에 나서지 않았다.
제논은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면서 물체가 이동한 거리만을 고려하여 물체가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 물체의 이동은 움직이는 데 걸린 시간으로 움직인 거리를 나누어서 속도를 구하여 비교해야 한다. 즉 물체의 이동은 속도에 의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역설은 미분의 개념과 운동의 개념을 다루는 고전 물리학으로 쉽게 반박될 수 있다. 나와 함께 수강한 학생들 모두 공학을 전공하려고 고등학생일 때 이미 미분과 물리학을 깊이 있게 공부했기에 이런 정도의 역설은 쉽게 반박할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제논의 역설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물의 움직임을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철학자의 눈으로 본 화살의 움직임이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 강의에서 받은 느낌이 강렬했기에 오랜 세월 김형석 교수-제논-화살의 역설은 내 기억의 창고 속에 자리 잡았다가 가끔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반박하기에 그리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는데도 김 교수의 질문에 왜 학생 중 아무도 답변하지 못했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1. 아마도 ‘공자님 말씀은 모두 옳다.’는 식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니 뭔가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하여 비판하기를 포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유명한 정치인들에게 큰 잘못이 있어도 무조건 지지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비판의식의 부재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2. 질문을 던진 분이 유명한 교수님이니 깊이 생각해 보고 반론을 제기하기보다는 교수님이 정리하여 내려 줄 결론을 기다리겠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3. 반론을 제기할 생각은 있었어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입을 다문 학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의 학생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기에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바보로 양산된 셈이다.
철학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히 말해 비판적 사고력과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토론 과정에서 계발될 수 있는 의사소통 역량, 더 나아가 합의를 끌어내며 길러질 수 있는 공감 및 연대 역량을 키울 수 있다는 것 때문이라고 한다.
대학교에서 공부한 4년 동안 먹고 살기 위해 공부한 전공과목 말고는 교양과목으로 김형석 교수에게서 배우 철학개론이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제논이 제기한 화살의 역설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기억에 생생하다. 그것만으로도 주마간산 격으로 접해 본 철학개론이라는 과목은 내 삶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2024년 7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