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조명이 어두워서

삼척감자 2024. 9. 7. 23:43

   너덧 살 때부터 지금까지 귀 때문에 적지 않은 문제를 겪으며 살아왔다. 휴전 직후에 중이염으로 고생했지만, 당시에는 위생 관리가 열악했고 의료 시설 이용이 어려웠기에 그냥 방치해 두어서 문제를 키웠던 것 같다. 자라며 오랫동안 이명으로 고생했지만, 특별히 치료를 받은 기억이 없다. 난청으로 평생 어려움을 겪으며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여러 차례 만나 보았지만, 진료를 통해 청력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어릴 적에 치료받아야 했는데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었다.

   청력이 시원치 않으니 수업 시간에 강의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고, 대화가 원만하지 않아서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지 않아도 내성적인 성격이 더욱 움추러들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귀만 정상이었더라면,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원만해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 거라며 가끔 아쉬워하곤 한다.

 

   다행히 눈은 지극히 정상이다. 많은 독서와 영화 감상 그리고 회사 업무 처리를 위한 특허 명세서 번역 등으로 눈을 매우 혹사했는데도 시력은 정상이어서 하느님은 나쁜 귀대신 좋은 눈을 주셨으니 공정하신 분이라며 감사드린다.

   생각해 보니 눈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기는 했다. 15년 전 환갑 다음 날 일어나니 사물이 위아래로, 이중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한 분 모시기도 벅찬 마님이 위아래로, 두 분으로 늘어나니 감당이 어려울 것 같아 걱정되었다. 길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도 위아래로, 두 대가 동시에 달리니 무척 혼란스러웠다. 서둘러 안과 전문의를 만나 그의 지시에 따라 MRI를 찍어보니 안구를 움직이는 근육 한 개가 마비되었다고 했다. 그냥 두면 저절로 회복될 테니 기다려 보자고 해서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지냈는데, 석 달 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일흔다섯 살 된 지금까지도 안경 없이도 책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지난해에 안과의사를 만났더니, 눈에 노화현상이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 백내장 수술을 받기에는 이른 것 같고, 대체로 나이에 비해 시력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그래도 나이 든 탓인지 멀리 있는 물체를 보면 두 겹으로 보일 때도 있고, 하늘에 뜬 달은 항상 이중으로 보이지만,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그러나 조명 정도에 따라 사물이 달리 보이기도 하는 건 당혹스럽다.

   조명이 조금 어두운 우리 집 화장실의 거울을 보면 언제나 잘생긴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주름살도 거의 없는 팽팽한 피부, 대체로 검은색인 머리카락, 아직도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아니 이게 누구야?” 그렇게 홀로 감탄하곤 한다.

   그런데 조명이 환한 체육관 화장실에 가면 그런 환상이 금세 깨어진다. 거울에 비치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생기 없어 보이는 늙은 남자의 모습은 아주 다르다. 윤기 없는 피부에 검은 반점이 보이는 얼굴, 거의 백발인 머리카락, 꾀죄죄해 보이는 모습이 아침에 우리 집 화장실에서 본 남자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덩치가 큰 미국인들의 모습이 거울에 같이 비치면 내 자신이 더욱 왜소해 보여서 주눅이 든다. 그렇다고 체육관 화장실 조명을 낮추자고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다.

 

   1년 전 아내 생일을 맞아 분위기 있는 바닷가 식당에서 저녁을 했다. 식당 옆에 바다가 맞닿아 있어서 경관이 좋기 때문인지 여름철 성수기에는 주차할 자리를 찾기도 어려운 인기 있는 식당이다.

   딸들에게서 두둑한 선물(현금)도 받았기에 호기롭게 평소에는 가지 않던 그 식당에 갔는데, 식당 바로 옆까지 밀려오는 파도에 홀렸는지, 아니면 어두운 식당 조명 탓이었는지 몰라도 뜻밖의 실수를 했다. 커다란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16.50짜리 해산물 에피타이저가 괜찮아 보였다. 바닷가재, 새우, 조개류 등이 맛뵈기로 조금씩 포함된 해물 모둠이라고 생각하고 메인 디쉬를 주문하기에 앞서 우선 주저하지 않고 그걸 시켰다. 값도 비싸지 않으니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나온 음식을 보니 커다란 3단짜리 그릇에 담긴 호화판 요리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거창해 보여서 뭔가 이상했다. 다시 메뉴판을 달라고 해서 들여다보니 아뿔싸, $165짜리였다. 에피타이저 바로 옆에 적혀 있었지만, 정식 요리였다. 기왕 시킨 거라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이런 실수가 없었더라면 나 같은 짠돌이가 언제 이런 고급 요리를 먹어 본담?      그날이 마침 아내의 일흔 번째 생일이라서 기쁜 마음으로 잘 먹고 소화도 잘 시켰다. 배가 아프지는 않았다. 나중에 딸들과 그 음식 얘기를 나누며 한바탕 웃었다. 조명이 밝았더라면 실수로 그렇게 맛있고 값비싼 음식을 주문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오늘 같은 날은 돈 아끼지 말고 비싼 음식 시켜서 잘 먹으라.”는 그분의 뜻이 작용하여 내 눈을 잠시 어둡게 했나 보다.

 

(2024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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