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강호의 숨은 고수

삼척감자 2025. 2. 25. 00:50

전에 다니던 성당의 음향 설비 수리를 위해 M (익명)가 평일에 성당에 자주 들렀다. 올 때마다 혼자서 텅 빈 성당에서 작업을 마친 후 사무실에 잠깐 얼굴을 비추거나, 아니면 말없이 사라지곤 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늘 무표정한 그는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와 제대로 된 대화란 걸 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신자 수에 비해 내부 공간이 커서인지 성당의 음향 설비는 늘 말썽을 부렸다. 부분적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갑자기 이상 고음이 발생하는 등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아서였는지 작업하러 올 때마다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언젠가 성당 앞에 차를 세워둔 채 쉬고 있는 그에게 어쩌다 음향 관련 일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그냥 취미 삼아 하던 일이 생업이 돼버렸다.”고 말하기에 나는 전공이 전기공학이고, 전에 L 전자에서 미국 서비스 책임자로 일한 적도 있었는데, 교통사고 후 지금은 팔자에도 없는 성당 일을 보고 있다.”고 했더니 혹시 자기 형인 S (익명)를 아느냐고 물었다.

 

알다 마다. L 전자 서울 서비스 센터에서 실력 있는 서비스맨으로  알려졌던 그를 모를 리 없지. 내가 미국에 오고 몇 년 후 그는 미국 이민 후 L 전자의 미국 서부 지역 서비스를 담당하는 외주회사에서 일하게 되어 내가 LA에 출장하면 보곤 했고 가끔 전화로 그 회사의 P 사장을 통해 그의 안부를 물었다. 입사 후 성실하게 근무하고, 같은 회사에 다니던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고……그렇게 미국 이민 생활에 잘 적응하며 지내는 것 같았다.     

 

아직도 그가 신혼일 적에 그 회사 사장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충격적이었다. 근무 중에 몸에 이상을 느껴서 응급실로 실려 간 그가 바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 한창일 때였다. 몇 년 후 나는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고 그가 다니던 회사도 문을 닫게 되어 그는 그렇게 내 기억 속에 사라졌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나서 동생 M 씨와 우연히 나눈 대화 중, 그가 형수의 연락처를 알아봐 주기를 부탁했다.

 

그래서 바로  P사장에게 전화했다. 얼마 후에 받은 그분의 전화에 따르면, 회사를 폐업하고도 몇 년 동안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예전 직원들이 모여 함께 식사했는데, 처음 두어 해는 S의 아내도 참석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고 했다. 내 부탁에 따라 예전 직원들을 통해 여기 저기 알아보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더라고 했다. “아마, 타주로 떠났나 봐.” 이게 아직도 젊은 그의 아내에 대해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추측이지만, 그 말을 들으니 허탈했다.   

 

내가 그 성당을 떠나고 2년이 지났을 때 뜻밖에도 M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 64, 부음을 전하기에는 무척 이른 나이였다. 그의 별세를 전하는 이어진 언론 보도를 보고 나는 매우 놀랐다. 아래 기사 중 몇 줄만 읽어도 화려했던 그의 지난 시절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980년대 포크 그룹 '따로 또 같이'로 활동한 가수 겸 작곡가 M이 지난 5일 미국 뉴저지주에서 지병으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64. 고인은 청년 시절 라이브 카페 무대에서 공연해 오다 1976년 강인원을 만나게 돼 함께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79년 강인원을 비롯해 이주원, 전인권과 포크 그룹 따로 또 같이 1 '노래 모음 하나'를 냈다. 이후 전인권과 강인원이 잇달아 팀을 탈퇴했고 M은 이주원과 함께 팀에 남아 34집을 발표했다. 3집은 따로 또 같이의 최고 명반이자 들국화 데뷔 음반과 함께 1980년대 중후반 국내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를 이끌었다. 포크와 록의 결합을 보여준 따로 또 같이는 1988년까지 활동하는 동안 1970년대 포크 문화와 1980년대 록 문화의 가교 구실을 했다. 들국화의 모체가 된 그룹이라는 평가도 있다.”

 

어릴 적에 즐겨 읽던 무협지에는 숨은 고수가 내공을 숨기고 강호에 숨어 지냈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캐릭터는 보통 겉보기에는 평범하거나 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강력한 무공을 지닌 인물이다. 그의 정체는 대개 극적인 순간에 드러난다.

 

신문 기사에 나온 그의 음악은 유튜브에도 적지 않게 등장하고, 아마존에도 그가 제작한 음반이 여러 장 올라와 있다. 몇 곡을 들어보니 내 감성이 딱 맞는 게, 그의 생전에 육성으로 이들 음악을 들어보지 못 했던 게 아쉬웠다.

 

우연히 그들 형제를 알게 되었고, 그들은 나와 스쳐 가듯이 이 세상을 이른 나이에 떠났다. 지금쯤은 하느님 나라에서 형제가 오랜만에 서로 만나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한다.

 

(2025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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