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는 지금까지 쓰인 문학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들 중 하나이며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욥기는 내용이 경이롭고, 아름다우며, 잊히지 않고, 신비스럽고, 온화하면서도 대형 망치처럼 강력하다. 탐정 소설을 읽을 때와는 달리 따지지 않고 공감하며 열린 마음으로 읽는다면 그렇게 느껴진다.
욥기는 무한히 신비스럽기는 하지만, 마지막 부분. 하느님께서 욥에게 하신 말씀에 주제나 교훈이 매우 분명하며,드러나 있다. 욥의 문제가 악의 문제라면, 해답은 ‘우리는 해답을 모른다’일 것이다. 우리는 욥이 알았던 것보다는 몰랐던 것에 공감한다.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의 문제, 고통의 문제, 불의의 문제 등은 인생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다. 욥기는 우리에게 분명한 해결책이나 철학적인 결론이나 뛰어난 개념을 제시하지는 않으나, 무한한 신비를 드러낸다. 하느님의 어떠한 가르침보다는 하느님의 존재가 욥의 답변이다. 그분은 아브라함 허셀 랍비가 말했듯이 ‘친근한 아저씨 같지 않고 두려운 지진 같다’고 표현되는 하느님이다.
욥기에서는 욥의 관점과 하느님의 관점을 역설적으로 대비한 점이 대단히 극적으로 관심을 끈다. 독자는 머리말(제1장)을 통해 하느님의 관점을 공유하도록 허락받으나 욥은 허락받지 않는다. 이리하여 욥에게는 보이는 것과 실존 사이에 역설이 지속해서 존재한다. 하느님이 비난받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욥이 비난받는다. 욥이 하느님에게 질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느님이 욥에게 질문하신다.
욥기를 이해하는 다섯 단계
욥기에는 여러 개의 내용이 몇 개의 층을 이루고 있다. 표면에 있는 층을 벗겨내면 그 밑으로 여러 개의 층이 더 보인다. 이러한 다섯 개의 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층에는 악의 문제가 있다. 어떻게 선하신 하느님이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실 수 있을까? 욥의 세 친구가 제시한 해결책은 간단하다. 욥은 ‘선한 사람’이 아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것인가 아니면 욥의 선함을 의심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자, 뻔한 선택이지만, 그들은 욥을 의심한다. 이는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옳지 않다. 하느님께서 욥을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라 하신 하느님 자신의 말씀으로 그걸 알 수 있다.
둘째 층에는 믿음과 경험이 충돌하는 문제가 있다. 욥의 믿음은 그에게 (고통에 대한)보상을 기대하라고 이르나, 그의 경험은 그가 받는 고통이 부당하다고 알린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속성은 그분의 진실하심, 즉 신뢰성인데, 욥의 경험은 하느님이 믿을 수 없는 분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실제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욥이 시련을 겪고, 믿을 수 없는 사람임이 증명된다. 하느님은 그를 벼랑 끝까지 몰아 가지만, 욥은 그 시련을 이겨낸다. 몇천 년 후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그분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겪게 하시지는 않는다. (1 코린 10, 13)
셋째 층에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의 문제가 있으며, 욥이 하느님께 한 다음 질문에서 표현된다. “어찌하여 저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습니까?” (욥기 10, 18) 고통을 겪음에 따라 질문은 다른 색깔을 띤다. 그 질문은 철학자의 동떨어진 사색에서 나오지 않고 고통받는 이의 비명에서 나온다. “왜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나게 하셨습니까?” 욥은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한 아빠를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쳐다보는 어린아이와 같다.
넷째 층에는 정체성의 문제가 있다. 욥의 세 친구가 그를 위로하러 왔을 때 그들은 처음에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욥기 2, 12) 부스럼으로 뒤덮인 채 오물더미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추하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예전에 성문에 앉아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고결한 사람의 표상으로 칭송받는 게 마땅하다고 여겨지던 바로 그 욥이다. 그렇다고 욥은 정체성을 잃은 걸까? 아니, 정반대다. 마치 조각가가 정을 내리쳐서 위대한 조각상에 정체성을 불어넣는 것처럼, 그는 시련을 통해 가장 심오한 정체성에 도달한다.
다섯째 층이며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문제가 있다. 욥도 성경에 나오는 어떠한 인물도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시편 53, 2의 어리석은 자만 제외하고) 그러나 하느님의 의도, 하느님의 본질 그리고 하느님의 신뢰성 등은 성경과 욥기 전체에 걸쳐 드러나는 신비다. 그래서 제기되는 의문은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어떤 분이신가?’(신학자들이 갖는 의문)가 아니라 ‘하느님은 나에게, 그리고 욥에게 누구이신가?”이다. 이것은 다른 문제들도 풀기 위한 문을 여는 열쇠이다. 욥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의도를 드러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욥의 세 친구는 어리석은 이들이 아니다. 독자들은 종종 그들의 담론을 건너뛰고 욥의 말에만 집중하기도 하는데, 그건 잘못이다. 그들의 논쟁은 매우 치열하다. (1) 그들의 믿음은 하느님은 전선 하시고, 전능하시며 온 세상을 완전히 공정하게 다스리심을 전제로 한다. (2) 그들의 도덕적인 전제에는 선한 행위는 보상받고 악한 행위는 벌 받는 것이 추가된다. (3) 그들의 상식으로는 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행복이 주어지고, 악한 행위에 대한 징벌로 불행이 주어지며, 이들의 인과(因果)는 바뀌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한다. (4) 그들은 경험에 따라 욥이 대단히 불행하다는 걸 전제한다. (5) 그들은 욥은 대단히 사악하다는 논리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정확히 논리적인 형식에 따르기보다는 시적인 능력으로 논쟁을 요약했다. 욥은 거기에 답변할 수 없다.
하느님을 만나기
욥기가 제시하는 답변은, 첫째로, 하느님의 선하심과 공정하심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신비스럽다. 둘째로, 우리의 복 받음도 훨씬 더 신비스럽다. 장기간의 복 받음은 단기간의 불행과 맞먹는다. 시련은 지혜를 얻게 하고, 그 지혜는 복 받음의 핵심이다. 이러한 것은 모든 슬기로운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욥이 슬기로운 이들에게 오랜 행복의 핵심은 하느님을 직접 뵙는 것이라고 말한다. 욥은 설사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욥기 13, 15)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유대인들의 깊은 경외심과, 아무도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그들의 믿음을 이해해야 한다. 욥기의 끝부분에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욥에게 보여주시지만, 욥은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즐거워한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욥기 42, 5)
끝부분은 욥기에서 제기된 다른 문제에 답을 준다. 하느님께서는 욥이 고뇌한 끝에 물은 타당한 질문 중 단 한 가지에도 답변하시지 않았는데도 욥은 왜 만족스러워하는가? 욥은 온유하거나, 겸손하거나,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우리는 욥의 인내심에 관해 이야기하지 말고 그의 성급함에 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라고 한 조지 러틀러 신부의 말이 옳다.
욥은 그런 사람을 만족시킬 법한 단 한 가지 답변에만 만족한다. 만약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욥은 거기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마치 철학자들끼리 그러하듯이 끝없이 말을 주고받게 될 것이다. 답변 대신에, 욥은 질문하시는 분을 대한다. 말 대신에, 욥은 말씀이신 분을 대한다. 욥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죽음 직전에 십자가상의 주님에게서 받은 질문을 받는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서 잘 썼다. 너는 상으로 무엇을 받겠느냐? 토마스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답변을 했다. “주님만 계시면 됩니다.”
질문하시는 하느님
또 다른 문제는 적절한 시간 맞추기다. 왜 하느님께서는 37개의 장에 걸쳐서 욥이 긴 시간을 보내게 하실까? 왜 욥은 길고도 괴로운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야 할까?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하지만 욥은 구하는데도 오랫동안 찾지 못한다. 왜 그럴까?
하느님은 찾으시는 분이지 찾아지는 분이 아니고, 주체이지 대상이 아니며, 질문하시는 분이지 대답하시는 분이 아니고, 주도하시는 분이지 대응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욥의 질문에 답하려고 나타난 하느님은 참 하느님이 아니라, 적당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답을 주려고 프로그램된, 점을 치는 컴퓨터일 것이다. 하느님이 나타나시면 제일 먼저 그분은 “내가 질문할 차례이니 너는 대답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질문에 직접 답하시지 않고, 질문 대신 질문자에게 답하셔서, 관계를 바꾸시고 질문자가 답하도록 하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욥의 역할을 바꾸신다. 욥은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자신이 하느님에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무슨 뜻이냐?”라고 물으신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제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우라는 하느님에게서 바로 그 질문을 받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말이나 생각만으로’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겪는 시련에 대하여 행동하고, 선택하고, 대응함으로써 대답한다.
이리하여 다른 문제가 풀린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욥이 고통받게 하셨을까? 분명히 고소인인 사탄을 위한 건 아니다. 마치 치과의사의 연장처럼 사탄은 단지 하느님이 쓰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하느님께서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시하시고 욥이 얼마나 충실한지 알아보시려고 시험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욥을 위한 것이다.
욥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오물더미에 앉은 욥에게라면 터무니없이 들리겠지만, 그가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뵙자 욥은 그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욥 자신을 위해 이 모든 시련으로써 커다란 구멍을 도려내셨다. 하지만 열쇠가 없으면 자물쇠가 쓸모없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오셔서 그 구멍을 채워주실 때까지 구멍은 의미가 없다.
진실 말하기 대 진실하게 말하기
끝으로 욥기 42장 7절에 엄청난 수수께끼가 있다. 욥은 스스로 인정하기를 하느님에게 반항적이며 거칠고, 과오로 가득하며, 이단적(예를 들면 하느님은 공정하지 않다는 말)인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욥은 하느님께 대해 올바르게 말했지만, 세 친구는 정통적인 신앙에 관해 말했으나 올바르게 말하지는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세 친구가 한 말은 모두 성경에 나온다. 어떻게 이게 잘못일 수 있을까? 욥은 어떻게 그게 올바를 수 있느냐고 반박한다.
친구들은 진실을 말했으나 진실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욥은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진실하게 말했다. 친구들에게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았고, 무관심한 대상이었다. 그런데 욥에게는 하느님은 존재하셨고, 인간에게 관여하셨다. 세 친구는 하느님과 예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욥은 하느님과 폭풍같은 결혼을 유지하는 것처럼 싸우기도 하지만 이혼은 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욥의 담론과 친구들의 담론 사이의 커다란 차이는 그들은 하느님에 관해서만 말하지만, 욥은 하느님에게 말한다. 기도는 가장 정확한 신학이다. 하느님은 “존재하는 나다”이시지 ‘있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틴 부버 랍비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께 말씀을 드릴 수는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욥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하기 때문에 하느님에게 “고통받는 종”으로 선택받았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통받는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욥이 세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이신다. 욥기에서 우리는 영혼을 벗어나 골고타 언덕에서 일어나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생생한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론적인 드라마를 본다. 구멍 뚫린 가슴에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새겨져 있고, 소중한 속죄 제물로 천국에 올라가는 드라마이다. 욥기에 일어난 사건은 미사이고 욥은 제대다.
출전 : “You Can Understand the Bible”
필자 : Peter Kreeft (Boston College의 철학 교수)
번역 : 김형기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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