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화씨 90도(섭씨 32도)를 넘나드는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던 어느 날 에어컨이 가동을 멈추었다. 에어컨 덕분에 바깥 날씨와 관계없이 서늘한 실내에서 지내다가 찜통 온도를 견디려니 무척 힘들었다. 설치된 지 20여 년 된 기계니 제 수명이 다한 걸로 짐작되었지만,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때 쓰려고 매달 가스 요금에 얹어 내던 서비스 요금이 생각나서 그 서비스 회사에 전화했더니 닷새 후에나 기술자를 보내 주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 날짜로 예약을 해 두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가며 전화를 끊고 나서 관련 서류를 찾아보았더니 사그라들던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1. 가스회사와 에어컨(및 히터와 온수 공급기) 서비스 회사는 별개의 회사이지만, 가스회사의 요금 청구서에 얹어서 요금을 징수하는 게 딱 한전과 KBS 관계와 같았다.
2. 몇 년 동안 서비스 한 번 받은 적이 없는 데도 매달 거금을 또박또박 받아 가고 있었다.
3. 집 부근의 미국 에어컨 수리 업체 몇 군데와 한인 업체 한 군데에 전화해 보았더니 대개 이틀 이내에 출장 오겠다고 했는데, 한인 업체는 당일 밤늦게라도 출장 오겠다고 했다.
4. 한인 업체에 출장 요청을 하고 나서 바로 미국 서비스 업체가 몇 년 전에 일방적으로 보낸 계약서란 걸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1)계약서란 게 내 사인이 없는 일방적인 통지서에 불과했다.
(2)일 년 단위로 계약한다며 내 동의도 없이 매년 자동으로 갱신되게 되어 있다.
(3)매달 부과하는 서비스 요금이란 게 내가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주인과 계약한 대로였다. 물론 내 동의는 없었다.
(4)그러다가 “이 계약은 일방이 원할 경우 언제든지, 조건 없이 파기될 수 있다”라는 문항에 눈이 번쩍 뜨였다.
당장 서비스 회사에 전화해서 “별로 쓸모도 없는 서비스 계약을 당장 파기하겠다”고 했더니 담당자는 내년 5월 18일 이전에는 계약 파기가 불가능하다고 하기에 “언제든지, 조건 없이 파기할 수 있다”는 조항을 환기하며 계약 파기를 거듭 요구했지만, 담당자는 ‘파기 불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전화를 끊고 당장 그 회사에 ‘계약 파기가 안 될 경우, 법적인 문제 제기도 불사할 것이며 BBB, Consumer Protection Bureau 등 소비자 보호기관 몇 군데에 알려서 중재를 요청하겠다.”라고 이메일로 강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근거 서류 몇 가를 첨부했다.
어저께 오후에 한인 서비스 업체의 직원이 와서 에어컨을 점검하고 프레온 가스도 보충하고 부품 한 가지를 교체했더니 멀쩡하게 잘 돌아가서 기분이 상쾌해졌다. 예전에 가전회사의 서비스 부서에 근무하며 냉장고와 에어컨 수리를 많이 겪어본 내 경험에 비추어서 기계 교체를 권하는 기술자의 권유가 맞는다고 생각해서 바로 받아들였다. 임시로 수리한다고 해도 금세 또 고장이 날 것으로 판단되었고, 예전 기계에 주입하는 냉매(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R22 프레온 가스)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계속 오를 테니 교체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고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미국인 서비스 업체에서 직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해서 계약을 파기해 주겠다고 했다. 오죽 급했으면 휴일인 주일 아침에 전화했을까? 평소에 고객에게 제대로 대했으면 군소리 없이 요금을 꼬박꼬박 냈을 텐데. 고객이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하니 화들짝 놀라서 호들갑을 떠는 게 한심스러웠다.
서비스 업체를 다루는 방식은 사실 내가 오래전에 서비스 책임자로 근무하며 미국인 진상 고객들에게 배운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나도 그리 훌륭한 관리자는 아니었다. 타성에 젖어 고객을 다루다가 성깔 있는 분이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면 화들짝 놀라곤 했다.
계약 파기 연락을 받고 기분이 좋아서 성당에 다녀오자마자 와인 잔을 기울이며 아내에게 자랑했더니, 좀 지겨워하는 눈치다. 회사에 다닐 때는 허구한 날 진상고객에게 당한 얘기를 하더니 이제는 진상 고객 노릇 한 걸 자랑하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2023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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