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손자들과 외손녀들이 모두 멀리 떨어져 살기에 직접 만나는 건 몇 년에 한 번 정도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영상 통화로 그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데 열 살 넘은 아이들은 진작부터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외계인으로 생각하는지 영상에 모시기가 어려워서 네 살 된 막내 외손녀가 단골로 화면에 등장한다.
며칠 전 주말에 큰딸과 함께 막내 외손녀가 잠깐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가 했더니, “Mommy, I am busy.”라는 말을 남기고는 바로 사라졌다. 이제는 그 아이에게도 외계인 취급을 받는가 싶었다, 네 살짜리 아이가 바빠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대화할 시간이 없다는 게 우스워서 크게 웃었더니, 큰딸이 그 아이가 오후에 생일 파티와 친구 집 방문으로, 제 가방에 장난감과 몇 가지 소지품을 챙기느라고 바쁜 건 사실이라고 했다.
그래도 네 살짜리 아이가 바쁘다고 한 게 재미있기도 하고 그렇게 느낀다는 까닭이 궁금해서 인공지능(AI)에 “네 살짜리 여자아이가 과연 바쁘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이런 답변을 듣게 되었다. “네 그럴 수 있습니다. 네 살배기들은 빠르게 성장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주변 세상사에 관해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합니다. 그들은 에너지와 호기심으로 가득 차, 항상 새로운 걸 경험하면 흥분합니다.” 그리고 “네 살은 독립심과 자신감이 커질 때입니다. 그래서 뭐든 스스로 해 보고 싶어 해서 그런 시도가 저지당하면 좌절감을 느낍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많은 일을 하지 않더라도 때때로 바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답변을 읽으니 우리 외손녀가 지극히 정상적인 성장 단계를 거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 주위의 벌, 새, 사슴, 다람쥐 그리고 고양이 같은 동물을 보면 늘 바쁘다. 먹이를 구하거나, 다른 포식자를 피해 도망가거나, 어디론가 이동하며 쉴 사이 없이 늘 바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걸 보면 살아 있는 건 모두 바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네 살짜리 아이가 바쁘다고 한 말이 우습게 들린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닐까?
산다는 게 바쁘다고 느끼던가, 아니면 한가롭다고 느끼는 건 각자의 관점이나 성격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충분한데도 바쁘다고 느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할 일이 많은데도 그 일을 다 해내면서 여유롭다고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바쁘다고 느낄 것이다. 할 일이 많거나 가족을 돌보기가 힘들다면, 경제적으로 쪼들린다면 몸과 마음이 바쁠 것이며, 성격이 조급한 사람은 느긋한 사람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같은 일을 하더라도 더 바쁘다고 느낄 것이며, ‘빨리빨리’가 미덕이거나 실적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는 더 바쁘다고 느낄 것이다.
바쁘게 지내며 많은 성과를 올리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바쁘게 지내는 게 반드시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그러나 바쁘게 지내기와 여유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겠다. 지나치게 열심히 살다보면 스트레스를 받아 극도로 피로하여 건강에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래 전 직장에서 고객서비스 부서에서 근무할 때 회사 모토는 ‘신속, 정확, 친절’이었다. 잔뜩 화난 고객, 그것도 성질 급하기로 유명한 한국인 고객의 요구를 신속하게, 그것도 정확하고 친절하게 처리하려면 늘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몸과 마음이 바빴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던 생활 방식이 몸에 배어서인지 직장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할 일이 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게 불편해서 일을 만들어서라도 억지로 바쁘게 지내야 마음이 편해진다. 하기야 늘 덤벙대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게 어디 예전 직장 생활 탓뿐일까? 타고난 내 성격이 워낙 진중하지 못해서 그런 거지. 아무튼 산다는 게 바쁘다. 바빠. 그냥 까닭 없이 바쁜 것 같다. 외손녀도 바쁘고, 나도 바쁘고, 모두 바쁘다.
(2023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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