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말보로라는 마을

삼척감자 2023. 12. 13. 06:46

몇 년 전 뉴저지 주택국을 통해 은퇴 후에 살 집을 알아보고 있던 어느 날 말보로(Marlboro)에 적당한 집이 나왔으니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말보로? 그 동네가 뉴저지주 중부 지역 어디에 있는 것 같은데…..지도로 찾아보니 한인 타운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게 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범죄율이 낮고, 공기가 맑고 게다가 바다도 가까운 게 주거 환경으로 나무랄 데 없어 보였다.

 

오랫동안 뉴저지주 동북부 지역에 살던 나는 뉴저지 중부 지역에 있은 작은 마을인 말보로(Marlboro)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오래전 그 동네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는 소문(교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함)을 얼핏 듣고는 말보로 담배가 연상되어 담배 농장과 담배 생산 공장이 그 마을에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다. 

 

뉴저지 중부 교외 지역에 있는 Marlboro는 녹지대가 많고,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Marlboro라는 동네 이름은 1768년에 이 마을 동부에 Marl(=이회토, 泥灰土)이 대량으로 발견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회토는 석회암이 풍부한 점토 토양인데, 토양은 물을 머금고, 배수가 잘되며, 산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어서 피노 누아와 같은 품종의 포도 재배에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회토는 뉴저지주가 바다로 덮여 있던 선사시대에 존재하던 물고기, 조개 등 바다 생물의 잔해로 생성된 진흙인데 공장에서 화학 비료가 대량 생산되기 전에는 이 흙이 비료 대신 사용되어 뉴저지주는 물론 뉴욕주에서도 이 흙을 대량으로 사서 농작물 경작지에 뿌렸다고 한다. 이리하여 마을 이름이 이 진흙의 이름인 Marl에 마을이라는 단어 Boro(또는 Borough)가 합성되어 Marlboro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필립 모리스 회사에서 담배 이름으로 왜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을 사용했을까?

몇 개의 가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동네 이름과 담배 이름에는 연관성은 없다. 다만 남성 흡연자들을 겨냥하여 말보로라는 이름이 발음상 강한 느낌을 주기에 남자다움을 강조하려고 이 이름을 지었을 거라는 설명이 그럴싸하다.

 

오래전 잡지에 게재된 광고를 보면 카우보이 복장을 한 남자가 담배 피우는 모습 밑에 답뱃갑을 배치했고, 담뱃갑 위는 빨간색, 아래는 하얀색으로 강렬한 느낌을 주는데, 그 중간에 배치한 회사 로고 밑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했다는 “VENI-VIDI-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적어서 사나이 가는 길에 거침이 없음을 나타낸 게 인상적이다. 위에 빨간색을 칠한 건 Marlboro라는 단어가 미국 원주민(아메리칸 인디언) 어느 부족의 말로서 붉은 흙으로 덮인 땅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거라는 해석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이다.

 

지금 말보로는 40% 정도는 녹지대이며 나머지 땅은 포장도로와 주택지라서 이름도 낯선 이회토는 구경도 할 수 없다. 물론 담배 농장이나 공장, 그런 건 애당초 없었고 지금도 없다. 혹시 말 보러올 분이 있다면 다른 데 가서 알아 보셔.

 

(2023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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